제6강 : 충돌하는 입장을 조절하는 세 가지 방법(창조적 대안을 중심으로)
1. 양측의 주장이 충돌할 경우 이를 해결하는 방법
협상을 진행하다 보면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나 내가 뭔가를 양보하지 않고는 도저히 합의점이 도출되지 않는 상황, 이를 ‘입장의 충돌상황’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의 충돌상황에서는 ‘상대방이 그 입장을 주장하는 진짜 이유(욕구 ; interest)가 무엇이며, 나아가 이 입장에 대해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갖고 있는지, 아울러 다른 대안으로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입장의 충돌상황에서, 상대방의 욕구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합의점을 찾아서 양측이 어느 정도 만족하는 모습으로 협상이 종결될 때 우리는 ‘윈윈협상’이 성공했다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으로는 통상 다음 3가지가 거론된다.
가. 해결책 1 –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 입장을 관철시키는 방안
나. 해결책 2 - 각자 쟁점을 주고 받으면서 적절히 양보하여(Trade-off) 절충점을 찾는 방안
다. 해결책 3 - 새로운 창조적 대안(Creative Option)을 만드는 방안
2. 해결책 1 :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 입장을 관철시키는 방안
가. 상대방을 완전히 설득하여 내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① 상대방이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충분한 설득이 되어야 하고, ② 상대방은 그 쟁점에 대해서 처분가능한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 사례 1
제3강에서 인용되었던 'CD 할인혜택을 받고 싶은 학생'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학생은 CD 할인혜택을 받고 싶은데, 상점 주인은 맨해튼 주민에 한해서만 할인혜택을 준다는 입장이다. 최근까지 맨해튼에서 살다가 이사를 가버린 학생은 CD 할인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학생은 과연 상점 주인이 '왜 맨해튼 주민에 한해서만 할인혜택을 주려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상점 주인은 단골 고객 또는 앞으로 단골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고객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려 했던 것이다.
상점주인의 욕구(interest)를 알게 된 학생은 상점 주인에게 "나는 그 동안 이 가게에서 많은 CD를 샀던 사람이고, 이 가게의 서비스가 좋아서 비록 이사를 갔지만 계속 이 가게를 이용할 것이다"라는 점을 충분히 밝혔으며, 그 결과 CD 할인혜택을 얻게 되었다.
즉 학생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고 이를 관철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상대방의 욕구(단골고객을 우대하겠다)를 정확히 알고 거기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다. 사례 2
제4강에서 인용되었던 ‘퇴원하려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딸’의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재활치료가 끝나기 전에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버지, 딸은 좀 더 치료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고집 센 아버지는 요지부동이다.
이 때 딸은 아버지에게 퇴원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아버지는 애완견과 산책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아빠, 지금 퇴원하시면 링고와 산책을 할 수가 없어요. 지금의 몸 상태로는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아요.”라고 설득하고, 이에 아버지는 고집을 꺾고 재활치료를 끝까지 마쳤다.
딸은 아버지의 숨은 욕구(애완견과 산책하고 싶다)를 정확히 알고 이에 집중했기에 자신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었다.
라. 이와 관련하여 주의사항 한 가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실제 협상을 진행하다보면, 대립되는 쟁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레 대립되는 쟁점으로 착각(오판)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에게 허심탄회하게 나의 입장을 이야기했을 때 의외로 상대방이 선선히 수용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의 요구를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는 지레 불필요하게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미루어 짐작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과감하게 우리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뷰티플마인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교수가 수업을 하러 2층 강의실에 들어온다. 그런데 창문이 열려있었고, 바깥에서는 통행로 보수 공사를 하느라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꽤 시끄럽게 들렸다. 교수는 창문으로 다가가서는 창문을 닫아버린다. 수업에 방해가 될 것이기에 그랬으리라. 학생들은 ‘너무 더워요.’라면서 불평을 했지만 교수는 ‘여러분들의 그런 요구를 다 받아 들일만큼 난 여유가 없소’라면서 수업을 시작하려 한다.
그 때 어느 여학생이 창문으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확 열어버린다.
순간 교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 여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한다. 하지만 그 때 여학생은 창밖에 있는 인부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한다.
“저기요, 부탁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수업을 하고 있는데, 창문을 열어 놓으면 기계 소리 때문에 교수님 말씀이 잘 안 들리고, 그렇다고 창문을 닫으면 너무 더워서요. 혹시 한 시간만 다른 곳에서 먼저 작업을 해 주시면 안되나요?”
그러자 바깥에 있던 인부들은 호탕한 목소리로 “네, 그렇게 하지요.”라면서 작업장소를 딴 곳으로 이동했다.
교수는 아마도 ‘인부들에게 부탁을 해 봐야 들어주지 않을거야’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거나, 굳이 그런 식의 갈등상황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싫었기에 그냥 더워도 참고서 문을 닫은 채로 수업을 하려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여학생은 정확하게 자신의 요구를 인부들에게 설명했고, 그 결과 의외로 쉽게 갈등상황을 해소할 수 있었다.
상대방에게 말해 보지도 않고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해 버릴 필요는 없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해결책 2 – 각자 쟁점을 주고 받으면서 적절히 양보하거나 주고 받는 방안(Trade-off)
가. 충돌하는 당사자 간에 ‘쟁점’이 여러 개가 있다면 각자 쟁점을 하나씩 양보하면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앞서 제5강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조금 더 보완하고자 한다.
나. 예를 들어 부부가 오랜만에 주말에 저녁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남편은 “매운탕”을 먹고 “미션임파서블 4”를 보고 싶은데, 부인은 “파스타”를 먹고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싶어했다. 간만에 분위기를 살리려고 주말 데이트를 기획했던 부부는 저녁 메뉴와 영화 고르는 문제로 집에서부터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다. 위 사례에서 쟁점은 “식사 메뉴”와 “영화”, 이 두 가지이다. 따라서 각 쟁점을 놓고 서로 교환(Trade-Off)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이 때, 각 쟁점 중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쟁점이 다를 경우에는 원활한 교환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남편은, 파스타를 먹는 것은 무방하지만, 미션임파서블 4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와이프는 (남편이 좋아하는) 미션임파서블 4를 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도저히 매운탕을 먹고 싶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양보 가능한 쟁점은 남편의 경우 식사 메뉴이고, 와이프의 경우 영화 종류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식사 메뉴를, 와이프는 영화종류를 양보함으로써, 같이 파스타를 먹고 미션임파서블 4를 보는 식으로 절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라. 이런 식의 교환방식은 노사 협상 과정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회사측과 노조측이 각각 10가지 쟁점으로 대립할 경우 다섯 개의 쟁점에 대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양보를 하게 되면 양측은 모두 ‘상대방이 5가지를 양보했다’면서 결과적으로 윈윈협상이었다는 식의 발표를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쟁점을 제시하는 것은 협상을 원활하게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강하다.
마. 교환과 비슷한 방식 중에 보상(Compensation)의 방식을 취하는 것도 있다.
위 부부의 사례에서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매운탕’을 먹고 ‘미선임파서블 4’를 관람하기로 하되, 식사메뉴와 영화선택권을 양보한 와이프에게 한 달 뒤에 멋진 선물을 하기로 하는 방식이 바로 보상의 방식이다.
바. 보상 방식의 사례 : 계약기간과 관련한 협상 과정
중요한 계약협상을 진행할 경우 “을”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3년 이상의 계약기간을 보장받고 싶은 반면에 “갑”으로서는 일단 계약기간을 1년으로 하자고 버티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을”은 ‘3년 정도는 보장이 되어 생산 라인을 책임지고 가동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갑”은 ‘계약기간은 나중에 합의를 통해 연장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면서 그냥 1년 계약기간에 날인을 하자고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막상 ‘갑’이 1년 계약기간 만료 시점에 ‘계약연장’에 대해서 합의를 해 주지 않으면 계약기간 연장은 사실상 힘들어진다. 따라서 이 경우 “을”은 “갑”에게 이런 식의 주장을 할 수 있다.
① 좋다. 당신의 입장이 1년 이상의 기간을 계약서에 명시할 수 없다는 것이니 십분 이해하고 이를 수용한다.
② 하지만 당신은 1년 후에 계약 연장해 주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③ 그렇다면 아예 계약서에 “계약기간 만료 시점에 ’을‘이 별다른 귀책사유가 없는 경우 계약기간 연장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당신의 입장과도 같지 않은가?
즉, “갑”의 주장(계약기간을 1년으로 한정)을 수용하되, 단서 조항을 달아서 “을”에게 귀책사유가 없을 때 “갑”은 계약기간 연장에 동의한다는 점을 명시한다는 것은 “갑”의 제안을 수용하는 대신 “을”에게 일정한 보상을 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해결책 3 – 완전히 새로운 창조적 대안(Creative Option)을 도출하는 방안
가. 갈등상황을 돌파하는 가장 멋진 방법은 바로 새로운 ‘창조적 대안’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Interest를 잘 파악해야 하며, 기존의 선입관을 깨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의 선입관(관성)을 얼마나 절묘하게 깨뜨릴 수 있느냐에 따라 ‘창조적 대안’의 도출 여부가 결정된다.
나. 사례 : 영화 ‘선생 김봉두’ 중에서
김봉두 선생은 강원도 시골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그는 첫 출근을 하다가 시골길에서 두 농부가 다투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농부 A는 길을 가로 질러 호스를 늘어뜨린 후 자신의 논에 물을 대고 싶어 하는데, 그 길 위를 경운기를 몰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농부 B는 그 호스를 치우라고 난리다.
농부 B는 A에게 ‘이 길을 당신이 전세냈냐?’고 따지고, 농부 A는 ‘경운기가 지나가면 호스가 터져 버리잖아? 딴 길로 둘러가쇼!’라면서 화를 낸다.
두 농부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자, 이를 본 김봉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그 시골길은 흙길이었으므로, 흙을 파내고 그 파낸 홈 사이에 호스를 지나가게 한 다음 다시 흙을 덮어버린다. 그러면 호스는 흙길을 관통해서 놓여지게 되어 그 위로 경운기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봉두 선생은 ‘호스는 물을 대는 기능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꼭 길 위에 놓여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간파하였기에(호스가 길 위에 위치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깼음) 서로 간의 입장을 고려한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 수 있었다.
다. 사례 : 귀를 뚫겠다는 딸아이를 설득하라.
귀를 뚫고 싶어하는 중3짜리 딸을 둔 엄마.
엄마는 너무 일찍 딸이 귀를 뚫었다가 부작용 때문에 고생할까봐 어떻게든 귀 뚫는 것을 말리고 싶다. 하지만 딸은 친구들도 많이 귀를 뚫었다면서 자신도 귀를 뚫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이 경우 제시해 볼 수 있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1) 대안 1 : ‘귀걸이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귀를 뚫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대안(귀찌 등)이 있다.
(2) 대안 2 : ‘귀를 뚫고 싶다’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고 나의 Identity를 표현하고 싶다’는 것이 목적이라면 ‘귀를 뚫어서 귀걸이를 하는 것’ 외의 대안(발찌 등의 아이템 등)을 제시해 볼 수 있다.
라. 사례 : 건원릉
구리시 소재 동구릉 안에는 태조를 시작으로 아홉 기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태조 이성계의 능은 외견상으로도 카리스마가 넘친다. 왜냐하면 다른 능은 ‘미끈한 잔디’로 봉분을 했는데 비해, 이성계의 건원릉은 ‘억센 억새풀’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를 총애했다.
그러나 그 총애로 인해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문제가 불거져 결국 제1,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방석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3대 왕으로 오른 태종(이방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신덕왕후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능 옆에 묻히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들어 줄 태종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나를 조상님들이 묻혀 있는 함흥 땅에 묻어다오.”
태종은 이성계 승하 후 고민에 빠진다.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를 함흥땅에 모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태조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에 마음이 쓰인 태종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까지 지키지 않았다는 불효자라는 낙인은 찍히기 싫었다.
고민 끝에 내 놓은 묘안이 바로, 묘자리는 한양 근처에 쓰되, 무덤을 덮는 봉분은 함흥지방의 흙과 억새로 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유언’과 ‘그 유언을 현실적으로 따르기 어렵다’는 그 두 가지 상반된 입장 속에서 아주 절묘한 창조적인 대안(Creative Option)을 도출한 사례로 평가될 만 하다. 함흥 억새는 함흥 지방 흙 위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벌초도 1년에 딱 한번만 한식 때만 한다고 한다. 억새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마. 사례 : 넓은 사무실을 원하는 두 동료
상대적으로 넓은 사무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언쟁을 벌이는 두 동료가 있다고 가정하자. 둘 다 ‘더 넓은 사무실을 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중재자라면 더 넓은 사무실이 필요한 이유를 자세히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설명을 들어봤더니 한 사람은 자신의 업무특성상 팀 회의를 자주 열어야 하는데, 회의실 예약이 힘들어 넓은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동료는 사무실을 방문하는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넓고 화려한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측의 입장은 얼핏 봐서는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보완관계를 이룰 수는 있다.
두 동료는 기존 크기의 사무실을 그대로 쓰되, 고객방문이나 팀 회의가 있을 때마다 사전에 예약하는 식으로 절충안을 만들 수 있다. 즉, 두 동료의 본질적인 욕구는 ‘자신이 필요할 때’ 넓은 사무실을 쓰고 싶었던 것이므로 그 욕구에 충실하면 두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바. 사례 : 호텔 매수 중개건
협상론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로저피셔 교수가 어느 회사 사장을 도와 건물을 팔았던 경험담이다.
사장(건물주)은 은퇴하면서 여생을 준비하기 위해 건물을 팔려고 했다. 건물가격으로 200만 달러를 원했지만, 매수 희망자는 그 가격에는 건물을 사지 않겠다고 했다.
피셔 교수는 건물주에게 ‘이 건물을 팔면서 당신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건물주는 ‘건물 한 쪽의 사무실에 내가 지난 25년간 보관해 온 서류들이 쌓여 있습니다. 나는 그 서류들을 버리기 싫습니다. 그 서류에는 나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디에 보관할지가 큰 걱정거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피셔는 매수 희망자에게 그 건물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물었다. 매수 희망자는 그 건물을 호텔로 쓸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피셔는 서류가 보관되어 있는 구석 사무실을 건물주가 3년 동안 사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매수 희망자는 이 제안에 동의했으며 적정한 가격에 거래가 성사되었다(CFO Magazine, 2001. 9. 1.).
피셔 교수가 협상가로서 뛰어난 점은 건물주에게 ‘이 건물을 팔면서 당신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게 무엇이냐?’라고 질문했던 점이다. 보통은, ‘건물 팔려는 사람 입장에서야 가장 중요한 게 돈이잖아? 비싸게 팔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피셔 교수는 협상의 전문가답게 매도인의 진정한 욕구(interest)를 ‘질문’을 통해 파악했고, 그 욕구를 매수인으로 하여금 충족시키게 절충해 줌으로써, 쌍방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협상을 이끌어 낸 것이다.
아울러 피셔 교수는 건물을 팔 경우 무조건 매도인은 그 건물에서 나와야만 한다는 선입관을 깨 주면서, 정말 중요한 일정 공간(서류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은 건물을 팔더라도 일정기간 사용하게 할 수 있도록 창의성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사. 사례 : 조건부 계약을 활용하여 입장을 절충한 경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느 공구상점을 상속받은 남매가 있었다. 누나는 그 상점의 수익성이 꾸준히 내려갈 것이라고 예측한 반면, 남동생은 상점 운영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누나는 그 상점을 팔기를 원했고, 남동생은 계속 운영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남매 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건부 계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했다.
첫째, 상점은 동생이 독자적으로 운영한다.
둘째, 동생은 누나의 지분을 점진적으로 사들인다.
셋째, 누나는 자신의 지분이 전부 매수될 때까지는 일정 수익률을 동생으로부터 보장받는다.
즉, 남동생은 일단 자신이 그 상점을 계속 운영한다는 전제 하에 상점에 대한 누나의 부정적 전망을 존중하여 상점소유권 중 누나의 몫(1/2)을 일정기간에 걸쳐 돈을 주고 사주기로 했다. 누나는 자기 몫이 전부 매각될 때까지 일정한 수익을 보장받았는데, 그 수익이란 영업실적에 대한 동생의 예측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동생은 자신의 긍정적 전망에 기초하여 계속 상점을 운영하면서 궁극적으로 상점의 지분권을 매입할 수 있었고, 누나는 자신의 부정적 전망에 기초하여 일정기간 수익률을 보장받으면서 그 대신 상점의 지분율을 매각한 것으로서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서로의 전망이 엇갈릴 경우에는 각자의 입장에서 일정한 조건을 걸어서 조건부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공동저자(갑, 을)가 책을 집필한 다음 출판사에게 원고를 넘기려고 하는데, 갑은 이 책이 별로 팔릴 것 같지가 않아서 일정금을 받고 원고의 소유권을 넘기려는 매절(賣切) 방식을 택하려고 하고, 을은 이 책이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많이 받을 것 같기에 일반적인 인세방식(전체 매출액의 8~10%)으로 하기를 원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두 저자가 같은 입장을 취해주기를 바라는데, 저자들이 서로 조율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경우 역시 각자의 전망에 기초해서 계약을 분리시키는 방법을 쓸 수 있다. 즉, 출판사는 저자 갑과의 관계에서는 매절 방식의 계약을, 저자 을과의 관계에서는 일반적인 인세방식의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
반드시 두 명의 저자와 ‘동일한 형태의 계약’을 체결해야만 한다는 경직성을 탈피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형태의 대안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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