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적서, 발주서(PO)만으로 계약이 성립되는지 여부]

작성 : 조우성 변호사 (로펌 머스트노우)

1. 사안의 개요

김대표는 중소기업 '혁신테크'의 대표로, 대기업 '글로벌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253, 글로벌산업의 구매담당자 박과장으로부터 특수 부품 100개에 대한 견적 요청을 받았다. 김대표는 단가 50만원, 총액 5천만원의 견적서를 이메일로 발송했고, 박과장은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회신했다.

 

2주 후, 박과장은 김대표에게 "귀사 견적서 기준으로 발주서(PO) 발행했으니 확인 바랍니다"라는 이메일과 함께 발주서를 첨부했다. 발주서에는 부품명, 수량, 단가, 납기일(2개월 후)이 명시되어 있었다. 김대표는 이메일을 확인했지만 별도 회신은 하지 않았고, 곧바로 부품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납기일 2주 전, 박과장은 갑자기 "내부 사정으로 이번 발주는 취소되었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미 김대표는 원자재를 구매하고 생산을 80% 완료한 상태였다. 김대표는 "계약이 성립했으므로 취소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글로벌산업 측은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발주서에 대한 귀사의 승낙도 없었으므로 계약이 성립되지 않았다"며 납품 거부 의사를 밝혔다.

 

2. 법적 쟁점 및 법리 검토

 

. 견적서와 발주서만으로 계약이 성립하는지 여부

 

계약은 청약과 승낙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의사표시의 합치에 의해 성립한다.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당사자 사이에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의사의 합치는 계약의 본질적 사항이나 중요 사항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있거나 적어도 장래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기준과 방법 등에 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계약이 성립하기 위한 법률요건인 청약은 그에 응하는 승낙만 있으면 곧 계약이 성립하는 구체적, 확정적 의사표시여야 한다. 따라서 청약은 계약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항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53039 판결).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떠한 계약 내용을 처분문서인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 그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문언대로의 의사표시의 존재와 내용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지만, 그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당사자의 내심의 의사 여하에 관계없이 그 문언의 내용과 그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그 계약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사, 거래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과 거래의 통념에 따라 당사자 사이의 계약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민법 제532조는 "청약자의 의사표시나 관습에 의하여 승낙의 통지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계약은 승낙의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사실이 있는 때에 성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의사실현에 의한 계약 성립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상법 제53조는 "상인이 상시 거래관계에 있는 자로부터 그 영업부류에 속한 계약의 청약을 받은 때에는 지체없이 낙부의 통지를 발송하여야 한다. 이를 해태한 때에는 승낙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 견적서의 법적 성격과 발주서의 의미

 

견적서는 일반적으로 계약 체결을 위한 청약의 유인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견적서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확정적이어서 상대방의 승낙만 있으면 계약이 성립할 수 있을 정도라면 청약으로 볼 수도 있다.

 

발주서(Purchase Order, PO)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고자 하는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발행하는 문서로, 일반적으로 구매 의사를 표시하는 청약으로 해석된다. 발주서에 물품명, 수량, 단가, 납기일 등 계약의 본질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면, 이는 청약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3. 사안에 대한 답변

 

. 견적서와 발주서의 법적 성격 분석

 

본 사안에서 김대표가 제출한 견적서는 청약의 유인으로 볼 수 있다. 견적서 자체만으로는 계약 체결의 확정적 의사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글로벌산업의 박과장이 발행한 발주서는 부품명, 수량, 단가, 납기일 등 계약의 본질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청약으로 볼 수 있다. 발주서는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확정적이어서 상대방의 승낙만 있으면 계약이 성립할 수 있는 상태였다.

 

. 계약 성립 여부 판단

 

김대표는 발주서를 받고 별도의 승낙 의사표시를 명시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부품 제작에 착수했다. 이는 민법 제532조에서 규정하는 '승낙의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사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김대표의 부품 제작 착수 행위는 묵시적 승낙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상법 제53조에 따르면, 상인이 상시 거래관계에 있는 자로부터 그 영업부류에 속한 계약의 청약을 받은 때에는 지체없이 낙부의 통지를 발송해야 하며, 이를 해태한 때에는 승낙한 것으로 본다. 김대표와 글로벌산업이 상시 거래관계에 있었다면, 김대표가 발주서에 대해 명시적인 거절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승낙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본 사안에서는 글로벌산업의 발주서(청약)와 김대표의 부품 제작 착수(묵시적 승낙)에 의해 계약이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계약 성립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계약은 당사자의 합의만으로 성립하는 낙성계약이며, 특별한 방식을 요하지 않는 불요식계약이기 때문이다.

 

. 글로벌산업의 일방적 취소 가능 여부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한 이상, 글로벌산업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 계약의 해제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하거나, 법률에서 정한 해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본 사안에서 글로벌산업의 "내부 사정"은 법률상 인정되는 해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로벌산업은 계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게 된다. 김대표는 이미 원자재를 구매하고 생산을 80% 완료한 상태이므로, 글로벌산업의 계약 불이행으로 인한 실제 손해와 기대이익 상실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4. 요약 및 시사점

 

견적서와 발주서만으로도 계약이 성립할 수 있다. 견적서는 일반적으로 청약의 유인으로 해석되지만, 발주서는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확정적이라면 청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승낙이 있으면 계약이 성립한다.

 

본 사안에서는 글로벌산업의 발주서(청약)와 김대표의 부품 제작 착수(묵시적 승낙)에 의해 계약이 성립했으므로, 글로벌산업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계약 성립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기업 간 거래에서는 분쟁 예방을 위해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하고, 가능한 한 서면으로 합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견적서를 제출하거나 발주서를 발행할 때는 그 법적 의미와 효력을 인식하고, 의사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계약 취소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에는 일방적 통보보다는 상대방과의 협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의뢰인이 꼭 알아야 할 핵심 Q&A

 

Q1: 견적서와 발주서만으로도 법적 구속력 있는 계약이 성립할 수 있나요?

A: , 가능합니다. 견적서는 일반적으로 청약의 유인으로 해석되지만, 발주서가 물품명, 수량, 단가, 납기일 등 계약의 본질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면 청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승낙(: 제작 착수)이 있으면 계약이 성립합니다. 정식 계약서 작성 여부는 계약 성립의 필수 요건이 아닙니다.

 

Q2: 발주서를 받고 별도의 승낙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는데도 계약이 성립했다고 볼 수 있나요?

A: , 가능합니다. 민법 제532조에 따르면 청약자의 의사표시나 관습에 의해 승낙의 통지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 승낙의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사실(: 제작 착수)이 있을 때 계약이 성립합니다. 또한 상법 제53조에 따르면 상인이 상시 거래관계에 있는 자로부터 청약을 받고 지체 없이 거절 통지를 하지 않으면 승낙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Q3: 계약 성립 후 일방이 "내부 사정"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나요?

A: 아니요,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한 이상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없습니다. 계약의 해제는 당사자 간 합의가 있거나 법률에서 정한 해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내부 사정"은 법률상 인정되는 해제 사유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일방적 취소는 채무불이행에 해당하며, 이로 인해 발생한 상대방의 손해(실제 손해 및 기대이익)를 배상해야 합니다.

 

**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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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적서와 발주서의 법적 효력 인포그래픽

이유: 품목, 수량, 단가, 납기일 등 핵심 조건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명확한 '청약'으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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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그 줄에 서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어느 골목 어귀,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앞에 뱀처럼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문득 궁금해진다. 저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갓 구운 빵의 온기, 혀끝을 녹이는 달콤함만을 위해 저토록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일까? 우리는 왜 긴 줄을 보면, 그 끝에 분명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풀어 말하면,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에 나도 따라 원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섬뜩한 통찰이다. 나의 욕망이 순수한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이미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오늘날 이 거울은 인스타그램의 네모난 프레임 속에서, 배달 앱의 반짝이는 별점 속에서, 유튜브의 ‘핫한’ 추천 영상 속에서 시시각각 우리를 비춘다. 우리는 타인이 ‘좋아요’를 누른 장소에 가고, 타인이 극찬한 음식을 주문하고, 타인이 입은 옷을 검색한다. 스크린 속 타인의 욕망은 거대한 자석처럼 나의 욕망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디지털 세상에서 증폭된 욕망의 신호는, 마침내 골목길의 긴 줄이라는 아날로그적 풍경으로 현현(顯現)한다. 최첨단 기술이 이끄는 욕망이 가장 원시적인 행위인 ‘기다림’으로 귀결되는 이 기묘한 디지로그(Digilog)의 역설.

 

그러나 잠시 그 줄에서 한 걸음 비켜나 보자. 그토록 열망하던 ‘무엇’을 손에 넣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 아마도 스마트폰을 들어 가장 먹음직스러운 각도로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는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올린다. ‘나도 마침내 이것을 욕망했다’는 증거를 타인들에게 전시하는 것이다. 정작 눈앞의 음식은 그 짧은 의식의 시간 동안 조금씩 식어간다.

 

이것은 비단 음식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좌표 삼아 내 삶의 항로를 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가 욕망하는 성공,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복의 기준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며 안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가 서 있는 줄에 합류함으로써, 정작 나만이 설 수 있는 고유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디저트는 과연 어떤 맛일까. 그것은 내 혀가 느끼는 순수한 맛일까, 아니면 ‘이것이 바로 그 맛’이라고 속삭이는 타인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맛일까. 마침내 줄의 맨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발견하길 원하는 것은 과연 그 대상 자체일까, 아니면 그것을 욕망하는 수많은 타인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일까.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줄의 끝에는, 진정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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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그 줄에 서 있는가

어느 골목 어귀,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앞에 뱀처럼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문득 궁금해진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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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오페라적 비극: 보헤미안 랩소디의 다층적 해석



노래 한 곡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드문 기적을 이루어냈다. 1975년, 3분짜리 대중가요가 음악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 프레디 머큐리는 6분에 이르는 음악적 서사시를 들고 나타났다. EMI 임원들이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다. "어느 부분을 싱글로 내면 좋을까요?" 그들의 질문에 프레디는 단호했다. "전부 다 내거나, 아니면 내지 말거나."

# 영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보헤미안 랩소디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혼의 고백이자 내면 여행의 기록이다. "현실인가, 환상인가"라는 노래 속 질문은 프레디가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던 시기의 혼란을 담고 있다. '보헤미안'이란 말은 원래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흐르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하게 되었다. 프레디는 이 노래를 통해 사회적 기대와 자신의 본성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을 그려냈다.

이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영혼을 팔고 죄를 지은 자의 고뇌와 구원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베엘제밥이 내게 악마를 보냈다"는 구절은 중세 유럽의 종교적 상상력을 담으며, 인간 내면의 어둠과 빛의 투쟁을 보여준다. 프레디의 피아노에서 흘러나온 이 곡은 마치 흑백 건반 위에 자신의 영혼을 펼쳐놓은 듯하다. 엄격히 나뉜 세상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선율로 그 경계를 허물었다.

# 하나의 곡에 담긴 음악적 우주

'보헤미안 랩소디'의 구조는 그 자체로 혁명이다. 서정적인 피아노 발라드로 시작해 오페라를 거쳐 격렬한 록으로 폭발한 뒤, 다시 조용한 발라드로 마무리되는 이 곡은 하나의 음악 안에 여러 세계를 담았다. 처음의 부드러운 Bb장조 피아노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고, 오페라 부분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성이 청자를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로 데려간다. "실루엣이 보인다"로 시작되는 다성부 합창은 르네상스 음악과 바로크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녹음 과정에서 프레디와 팀은 24트랙 녹음 장비의 한계를 뛰어넘어 180개 트랙을 쌓아올리는 기술적 모험을 감행했다. 이는 1970년대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정점이자, 지미 페이지나 핑크 플로이드가 추구하던 실험적 음악의 완성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영국 음악계는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인 실험으로 빛나고 있었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솔로는 이 곡의 전환점이다. 그의 '레드 스페셜' 기타가 울려 퍼질 때, 내면의 고뇌는 뜨거운 에너지로 분출된다. 마치 오랫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듯한 이 순간은 음악이 가진 해방의 힘을 보여준다. 메이의 기타는 울지 않고 노래한다. 그의 선율은 프레디가 피아노에 담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를 완성한다.

# 시대를 뛰어넘는 문화적 아이콘

초기 음악 평론가들은 이 곡을 "과장되고 의미 없는 가사 모음"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보헤미안 랩소디'는 대중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992년 영화 '웨인즈 월드'에서 주인공들이 차 안에서 이 곡에 맞춰 머리를 흔드는 장면은 새로운 세대에게 이 곡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8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며 이 곡의 전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짧은 노래가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이 6분짜리 음악 서사시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닌, 현대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내적 갈등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이 곡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가사에서, 연결되어 있으나 외로운 현대인의 모순된 삶을 발견한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 영상은 유튜브에서 10억 뷰를 넘어섰다. 세대를 초월한 이 곡의 매력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공연예술로 승화되었다. 스마트폰을 든 관객들이 한목소리로 "갈릴레오"를 외칠 때,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이렇게 보헤미안 랩소디는 분절된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연대감을 일깨우는 음악적 의식이 되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적 깊이와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얻은 '보헤미안 랩소디'는 오늘날까지도 자유로운 영혼의 메시지를 전한다.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은 이 위대한 작품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치 거울 앞에 선 것처럼.

 

https://youtu.be/fJ9rUzIMcZQ?si=3g9BzHSddkHWUiZS

 

[고전읽기] 바다와 인간 사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남긴 파도의 흔적



인생의 가장 깊은 진실은 때로 가장 간결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그렇게 단순한 줄거리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뇌와 존엄을 담아낸 작품이다. 처음 산티아고 노인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그의 굽은 등과 거친 손에서 삶의 무게를 느꼈다.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살라오'(불운한 어부)의 고독은, 현대 사회에서 연이은 실패로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 우리의 모습을 투영한다.

가장 마음을 울린 순간은 산티아고가 드디어 거대한 청새치를 낚았지만, 결국 상어 떼에게 그 전리품을 빼앗기는 장면이었다. 이 참혹한 패배 앞에서도 그가 보여준 존엄한 태도는 나에게 깊은 물음을 던졌다.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결과만이 전부인가, 아니면 그 과정에서의 투쟁 자체에 의미가 있는가?

헤밍웨이의 건조하면서도 정확한 문체는 마치 바다의 리듬처럼 내 의식 속에 파도쳤다. 그의 문장은 불필요한 장식 없이 오직 필요한 것만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언어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패배할 수 있지만, 파멸되지는 않는다"라는 소설 속 문장은 내 삶의 좌우명이 되었다.

만델은 산티아고에게 단순한 조수가 아닌 희망의 상징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세대를 뛰어넘는 인간적 유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만델이 노인에게 가져다준 커피와 신문, 그리고 그들이 야구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단순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교감의 순간들이다.

산티아고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이미지는 노인의 내면에 여전히 살아있는 야성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늙고 쇠약해진 육체와 달리, 그의 영혼은 여전히 젊고 강인하다는 아이러니가 가슴을 찔렀다.

바다는 이 소설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닌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때로는 적대적이고, 때로는 친밀한 이 존재와 산티아고가 맺는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바다를 '여성'으로, 청새치를 '형제'로 부르는 산티아고의 태도에서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느꼈다.

'노인과 바다'는 외로움, 패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인간의 끈질긴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내게 실패가 아닌, 그 실패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산티아고가 빈손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꿈꾸는 사자들처럼, 우리 또한 패배 속에서도 내면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헤밍웨이의 이 작은 걸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바다처럼 깊이를 품고 있다. 그리고 산티아고처럼, 이 소설 역시 겉보기에는 단순하나 그 속에 담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진실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 줄거리 요약

쿠바의 노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살라오'(불운한 사람)로 불린다. 유일한 친구인 어린 소년 만델마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른 배로 옮겨간 상황에서, 산티아고는 홀로 85일째 출항한다. 그는 운 좋게 거대한 청새치를 낚지만, 너무 커서 배에 실을 수 없어 배에 묶어둔 채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의 공격을 받는다. 필사적으로 상어들과 싸우지만 결국 청새치는 뼈만 남게 된다. 마을로 돌아온 산티아고는 지친 몸으로 쓰러져 잠들고, 만델은 그런 노인을 보살피며 함께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패배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그린 작품이다.

[고전읽기]  혼돈을 밥 삼아 자라나는 지혜: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



세상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허상이 되고, 확실한 것은 오직 불확실성뿐이라는 아이러니만이 남았다. 이런 시대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저 충격을 견디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오. 혼돈으로부터 이득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책 '안티프래질'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 안티프래질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것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탈레브는 말한다. 첫째는 '프래질'(깨지기 쉬운 것)이다. 도자기처럼 충격을 받으면 부서지는 존재들이다. 둘째는 '로버스트'(튼튼한 것)이다. 바위처럼 충격을 받아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안티프래질'이 있다. 이는 충격과 혼돈을 통해 오히려 강해지는 존재들이다.

어찌 보면 이상한 개념 아닌가. 어떻게 혼돈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적당한 세균에 노출될 때 강해진다. 근육은 적절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성장한다. 자연의 진화 메커니즘은, 변동성과 무작위성을 연료 삼아 더 강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안티프래질의 본질이다.

탈레브는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를 예로 든다. 한 개의 머리를 자르면 두 개가 다시 자라나는 괴물이다. 누가 봐도 이 괴물은 공격받을수록 더 강해진다. 이것이 바로 안티프래질의 특성이다. 

# 너무 많은 보호는 독이 된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모든 위험과 변동성을 제거하려는 강박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넘어질까 두려워 놀이터의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다. 경제가 작은 충격을 견디게 하지 않고, 모든 파동을 억제하려 든다. 그러나 탈레브의 주장은 정반대다. 작은 스트레스와 변동성은 시스템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과잉보호의 독(毒)'이라 부른다. 모든 위험을 차단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더 큰 취약성을 낳는다. 숲에서 작은 불을 모두 즉시 진압하면, 결국 대형 산불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은 충격들이 시스템을 단련시키고 회복력을 키우는 기회를 앗아가는 셈이다.

# 양 극단을 활용하는 지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안티프래질해질 수 있을까? 탈레브는 '바벨 전략'을 제시한다. 역기(바벨)처럼 양쪽 끝에 무게가 실린 전략이다. 한쪽은 극도로 안전하게, 다른 쪽은 대담하게 리스크를 취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투자의 경우, 자산의 90%는 현금이나 안전자산에 두고, 나머지 10%는 극도의 고위험-고수익 투자에 배분하는 것이다. 중간지대를 피하고 양 극단을 활용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예상 밖의 큰 이득을 얻을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 책임을 동반한 결정권

탈레브가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자신의 운명을 걸고 판단하는 태도'다. 이는 원래 'skin in the game'이라는 표현인데, 쉽게 말해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말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는 결정권자와 그 결정의 피해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정치인은 잘못된 정책을 펼쳐도 직접적인 고통을 겪지 않는다. 금융인은 위험한 거래로 수수료만 챙기고 실패의 대가는 타인에게 전가한다. 이런 책임 회피가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과 판단은 그 결과에 자신의 운명을 함께 걸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자신이 내린 판단의 결과를 직접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실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탈레브의 주장이다.

# 전문가들에 대한 회의

탈레브는 현대 사회의 '이론만 아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실제 세상의 복잡성을 단순한 이론과 모델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모델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다. 

특히 그는 가우시안 통계(정규분포)에 근거한 리스크 관리가 극단적 사건('블랙 스완')을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한다. 우리 세상은 평균과 표준편차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예상 밖의 극단적 사건들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는 실용적 지혜와 경험을 중시한다. 고대 로마인들의 실용주의와 지중해 문화권의 경험적 지식이 현대의 추상적 이론보다 때로는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 안티프래질 이론의 약점들

탈레브의 주장은 매력적이지만, 몇 가지 한계도 지닌다. 우선, 그의 세 가지 분류(프래질-로버스트-안티프래질)는 현실의 복잡함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실제 세계의 많은 시스템들은 이 세 범주 사이를 오가며, 상황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론에 유리한 사례들만 선택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진화가 안티프래질의 좋은 예시이긴 하지만, 수많은 생물종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그의 방법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는 학술적 엄밀성보다 직관과 경험을 중시하지만, 이 접근법은 체계적인 검증이 부족하다. 그가 비판하는 '이론만 아는 지식인'들의 오류를 자신도 때로는 범하는 셈이다.

가장 역설적인 점은, 탈레브의 이론 자체가 '안티프래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 있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며, 비판에 열린 자세보다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프래질한' 지식 체계의 특성을 자신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불확실한 세상을 위한 지혜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은 현대 사회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금융 위기, 전염병 대유행, 기후 변화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빈번해지는 이 시대에, 탈레브의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다.

그의 핵심 교훈은 간단하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성장 동력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시스템은 적절한 스트레스와 변동성에 노출될 때 더 강해진다. 완벽한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기보다, 실패로부터 배우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결국 '안티프래질'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혼돈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탈레브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교훈일 것이다.

[인생내공컬럼] 견딜 수 있는 무게



바다는 유리 조각을 부드럽게 만든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밤새 갈아내고, 아침이면 또 갈아낸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동안 유리는 그 자리에 있다. 견디는 것이다. 날카로움이 무뎌지고, 모가 나던 것이 둥글어질 때까지 파도는 쉬지 않는다. 바다는 잔인하지 않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攻人之惡,毋太嚴。要思其堪受."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이 잘못한 것을 다스릴 때에도 너무 엄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견뎌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바다가 유리를 다듬듯, 사람은 사람을 다듬는다. 너무 거세게 다듬으면 깨진다. 너무 느슨하게 다듬으면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잘못을 바로잡을 때 정의를 말한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 한다. 그러나 정의는 때로 냉혹하다. 사람의 마음은 유리처럼 단단하지 않다. 쉽게 금이 가고, 한번 깨지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정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견딜 수 있는 무게를 재는 저울이 필요하다.

자전거를 처음 타는 아이는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고 배울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런 일은 없다. 균형을 잡는 법은 균형을 잃어봐야 안다. 사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잡으며 사람은 자란다. 너무 빨리 자라라 하면 부러진다. 너무 늦게 자라라 하면 시들어버린다.

물을 담는 그릇에는 한계가 있다. 넘치면 물은 흘러내린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면 마음은 넘쳐버린다. 조금씩,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변화해야 한다. 겨울 땅이 봄을 맞을 때도 한순간에 모든 눈이 녹지 않는다. 천천히, 조금씩,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녹는다.

사람마다 계절이 다르다. 어떤 이는 한겨울을 지나고, 어떤 이는 한여름을 산다. 같은 말이라도 겨울에 듣는 것과 여름에 듣는 것은 다르다. 같은 충고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르다. 타인의 계절을 읽는 것, 그것이 먼저다.

파도는 유리를 한 번에 부드럽게 만들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인내하며 다듬는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 견딜 수 있는 무게만큼만 말해야 한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말이 될 때도 있다. 기다림이 때로는 가장 단단한 가르침이 된다.

파스칼은 말했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림을 배우라.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스스로 익어간다." 바다는 알고 있다. 유리가 부드러워지는 데 얼마나 많은 파도가 필요한지. 사람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견딜 수 있는 무게를 헤아리는 것,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지혜다.


[사마천 사기 인문학] 구우일모(九牛一毛) - 사마천의 냉혹한 현실과 불멸의 의지



사마천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구우일모(九牛一毛)'라는 말은 아홉 마리 소에서 뽑은 털 하나의 미미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구절이 담긴 '보임안서(報任安書)'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한 미미함의 표현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자기 합리화의 논리이자, 역사가로서의 냉철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는 궁형(宮刑)이라는 치욕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죽어서 결백을 증명하는 일이 쉬웠을 테지만, 그는 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기러기 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사마천의 이 말은 죽음의 가치마저 상대적일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빚어진 그의 불행은 일견 개인적 비극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무제 시대는 명분이 실리를 압도하던 시기였다. 유교가 국교로 자리 잡으며 명분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마천은 현실의 복잡함을 직시했다. 그의 '구우일모'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고통이 역사 서술이라는 거대한 과업 앞에서는 아홉 마리 소의 털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불행을 객관화하는 냉철한 시선이면서, 동시에 어떤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인간은 개인적 고통을 넘어설 때 비로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의 선택은 당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형벌 후에 자결하는 것이 명예로운 일로 여겨지던 시대에, 살아남아 필을 들기로 한 그의 결정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치욕적 체험이 그의 역사 서술에 깊이와 통찰을 더했다.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낼 수 있는 시선을 얻은 것이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역사적 사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의 존엄과 더 큰 가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사마천의 딜레마는 현대 지식인의 고뇌와 다르지 않다. 그가 말한 '구우일모'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선택에 관한 질문이다.

역사는 냉혹하게도 승자의 기록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 냉혹한 법칙을 뒤집었다. 패자의 자리에서, 치욕의 자리에서 그는 더욱 객관적인 역사의 시선을 획득했다. 그의 『사기』가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읽히는 이유다. 그의 상처는 '구우일모'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그 상처를 통해 얻은 통찰은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사마천의 '구우일모'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직면한 고통과 선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개인의 명예와 더 큰 사명 사이에서,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사마천은 자신의 치욕이 역사라는 대서사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치욕을 견딘 의지야말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구우일모'가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적 진실이다.

[개념탑재] 미나리, 물과 흙 사이의 침묵 


물과 흙이 만나는 경계에서 자란다. 그 경계는 때로 모호하고 불안정하다.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사이에서 미나리는 뿌리를 내리고 초록의 줄기를 뻗는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미나리는 거기 있었다. 우리 밥상에, 우리 약방에, 우리 이야기 속에. 

"물과 흙 사이에서 자라는 미나리처럼, 인간도 경계에 선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뿌리내리는 존재로." 삶은 그런 것이다. 경계에 서서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것. 

# 뿌리와 흐름, 동에서 서로 

한반도와 중국, 일본이 미나리의 고향이다. *Oenanthe javanica*. 학자들은 그렇게 부른다. 고려 때 이미 '향약구급방'에 기록됐고, 조선의 의원들은 '수근(水芹)'이라 불렀다. 물가의 미나리. 그 이름조차 단순하고 명료했다. 

서양은 늦게 알았다. 19세기가 저물 때쯤, 동양의 이국적 식물로 그들의 정원에 심었다. 먹지 않고 보기만 했다. 겨우 한 세기가 지나서야 그들의 입에 들어갔다. 아시아 이민자들이 가져간 씨앗이 미국의 땅에서 자라고, 할리우드의 스크린에 오르기까지 했다. 

# 눈빛의 차이, 동양과 서양 

동양인의 눈에 미나리는 생명이었다. 정월 대보름, 미나리를 씹는 소리는 질병을 쫓는 주문과 같았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미나리 냄새에 젖은 편지를 보냈고, 그 향기에 어린 시절이 담겼다. 

중국인들은 '수근'이라 부르며 불로장생을 꿈꿨고, 일본인들은 '세리'라 이름 붙이고 봄의 전령사로 반겼다. 

한국의 시인들은 미나리를 글에 담았다. "미나리처럼 맑은 사람"이라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달랐다. 그들에게 미나리는 처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가, 나중에는 이민자들의 향수가 되었다.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상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미나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과학의 언어로 읽는 미나리 

선조들은 알았다. 경험으로, 감각으로. 과학자들은 뒤늦게 증명했다. 미나리에는 비타민이 가득하다. 레몬보다 많은 비타민 C, 그리고 A와 B도 충분하다. 칼륨, 칼슘, 철은 뼈와 피를 만든다. 

과학의 차가운 언어는 미나리의 성분을 분석한다. 페놀, 플라보노이드, 이소람네틴. 그 성분들은 몸속의 독을 씻어낸다. 간을 보호하고, 혈당을 조절하며, 염증을 가라앉힌다. 암세포조차 물러나게 한다. 술에 절은 간을 깨끗이 씻어내고, 도시의 매연으로 지친 폐를 달랜다. 

현대 의학은 이제야 미나리의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맑은 물에서 자란 미나리가 몸을 정화한다는 것을. 

# 식탁 위의 기억, 시대를 건너 

한국인의 식탁에 미나리는 여러 모습으로 올랐다. 미나리 김치, 된장국에 넣은 미나리, 쇠고기와 함께 싸먹는 미나리강회. 그 향기는 봄을 알렸다. 

중국인들은 미나리를 볶아 먹었고, 일본인들은 냄비에 넣었다. 베트남에서는 쌀국수 위에 띄웠다. 모두 제 방식대로 미나리를 품었다. 

이제 서양의 요리사들도 미나리를 만진다. 이탈리아의 파스타, 프랑스의 생선요리, 미국의 샐러드에 미나리가 들어간다. 텍사스와 조지아의 농장에서 미나리가 자란다. 물과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미나리는 뿌리를 내린다. 

# 시대를 건너 다시 만나다 

바다를 건너고 세월을 넘어, 미나리는 다시 주목받는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깊어질수록,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강해질수록, 미나리의 가치는 빛난다. 

서구식 식단이 가져온 병들, 현대인의 피로감, 환경오염이 만든 불안. 이 모든 것에 미나리는 답을 준다. 미나리 추출물을 넣은 약이 생겨났고, 미나리 성분의 화장품도 나왔다. 

더 중요한 것은 미나리가 물을 정화한다는 점이다. 오염된 습지에 미나리를 심으면, 물이 맑아진다. 미나리가 자라는 땅은 생명력을 회복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놓친 지혜다. 

물과 흙 사이, 그 경계에서 자라며 순환의 고리를 잇는 미나리. 그것은 어쩌면 인간 존재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서든 살아가는 법을 아는. 

"물이 흐르는 곳이라면, 미나리는 반드시 뿌리를 내린다. 인간도 그럴 수 있다. 어떤 땅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삶은 계속된다." - 《물의 기억》

[음악치료 이야기] 베토벤 월광소나타 3악장

**강마에**: 서연 씨, 오늘 너무 힘들어 보여요.

**김서연**: (한숨을 쉬며) 선생님... 요즘 너무 지쳐요. 회사에서는 잘한다고 평가받지만, 사실 매일 불안해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작은 실수에도 밤새 뒤척이고, 다음 프로젝트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휩싸여요.

**강마에**: 서연 씨가 느끼는 그 압박감이 많이 무거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잘했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김서연**: 맞아요. 주변에서는 '너무 자신을 몰아붙인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이 정도도 못 견디면 어떻게 성장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솔직히... 많이 지쳤어요. 기준을 낮추면 제가 평범해질까 봐 그것도 두렵고...

**강마에**: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오늘은 서연 씨의 그 마음에 공감될 만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인데요, 베토벤이 자신의 청력 상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시기에 작곡한 곡이에요.

**김서연**: 월광 소나타요? 1악장은 들어봤지만 3악장은 잘 모르겠어요.

**강마에**: 1악장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예요. 3악장은 매우 격렬하고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16분음표의 연속과 갑작스러운 다이내믹의 변화가 특징이에요. 마치... 누군가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김서연**: (관심을 보이며) 자신과의 싸움이요?

**강마에**: 네, 베토벤은 완벽주의자였어요. 게다가 청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엄청난 기준을 부과했죠. 이 곡을 들어보세요. 어떤 격정과 내적 갈등이 느껴지는지...

(음악이 흐른다 - 베토벤 월광 소나타 3악장)

**강마에**: 어떤 느낌이 드세요?

**김서연**: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정말... 격렬하네요. 마치 제 머릿속 같아요. 항상 뭔가에 쫓기는 것 같고,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음악을 듣고 있으니 제 마음이 조금 위로받는 느낌이에요.

**강마에**: 본인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음악을 들으면 그런 위로를 받기도 해요. 베토벤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높은 기준을 세웠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켰거든요. 서연 씨도 느끼셨겠지만, 이 곡은 곳곳에 짧은 쉼표와 다이내믹의 변화가 있어요. 격렬함 속에서도 호흡이 있는 거죠.

**김서연**: 제게는 그런 쉼이 부족한 것 같아요. 계속 달려야 한다는 강박만 있고...

**강마에**: 그 말씀 정말 중요한 포인트예요. 이 음악처럼, 열정과 추진력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지만, 중간중간 호흡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거든요. 베토벤도 자신의 한계와 싸우면서 이 곡을 작곡했지만, 모든 음표가 완벽하게 이어지진 않아요. 그 불완전함 속에 오히려 이 곡의 아름다움이 있죠.

**김서연**: (생각에 잠겨) 제가... 너무 완벽하려고 했나 봐요. 실수하는 제 모습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강마에**: 서연 씨, 베토벤의 삶을 보면, 그가 청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도 그의 작품은 오히려 더 깊어졌어요. 때로는 우리의 한계나 불완전함이 더 깊은 창조성과 자기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이 음악이 주는 메시지가 그런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김서연**: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 말이 왜 이렇게 와닿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같아요.

**강마에**: 다음 세션에는 이 감정을 좀 더 탐색해보면 어떨까요? 베토벤처럼 열정을 유지하되,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는 방법을... 그리고 음악처럼 강약의 조화를 찾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김서연**: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러고 싶어요. 이 음악이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네요. 제 마음속에 있던 감정을 누군가 이렇게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게 신기해요.

**강마에**: 음악의 힘이죠.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고, 때로는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 말해주기도 합니다. 오늘 세션이 서연 씨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길 바랍니다.

**김서연**: 네, 정말 큰 위로가 됐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https://youtu.be/IwCW7-aAlfQ?si=tQmQxdHdEeVlJm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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