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

조선 최초의 과거합격자

 

조선왕조 최초의 과거시험 합격자 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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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 은 1393(태조2) 3월에 실시된 식년문과 시험으로 33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여기에 태종 이방원의

핵심 측근인 이숙번이 들어있다.

약관의 나이로 무과가 아닌 문과로 급제하였으나 다른 무신보다 더 장수기질이 농후 하여 이방원과 같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강한 리더쉽으로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핵심인물로 승승장구 하다가 이후 오만방자함으로 발전하여 토사구팽의 원인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인물구성을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이방원이(유비현덕), 하륜이(제갈공명), 조영무가(장비), 이숙번은(관우,조자룡), 등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43세로 안성 부원군에 봉해질 때까지가 전성기였다면

그 후 68세로 죽을 때까지는 고난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로 거만방자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탄핵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게 되며 45

때엔 경남 함양으로 유배 생활을 하게된다. 조선초기 문무를 겸비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그의 재능이 권력의

풍선 위에서 춤을 추다가 최후에는 불행한 여생을 맞게 된 것이다.

 

이숙번의 교만

 

태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데에 공이 컸던 [[이숙번]]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교만해졌다는 이야기가 조선 초, 중기 설화집에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1) 이숙번은 크게 성공한 후 공적을 믿고 교만해져서, 같이 일하는 재상들에게도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태종이 불렀는데도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으며, 문안하느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내실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벼슬을 줄 사람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사람을 시켜 왕께 주달해 임용되도록 했기 때문에, 친한 사람들이 관직에 많이 임용되어 있었다. 돈의문 안에 큰 집을 짓고, 시끄럽다고 사람들을 못 다니게 했다. 뒤에 죄를 얻어 함양으로 귀양 갔다가, [[용비어천가]]의 자문 관계로 서울에 왔을 때에도 많은 후생들이 배알했는데 어릴 때의 일들을 말하면서 교만하게 행동했다.

2) 이숙번은 거만하여 왕이 불렀는데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병을 탓하여 가지 않으니 이 일로 귀양을 갔다. 세종이 즉위하자 도승지 [[김돈]]에게 순금띠를 기증하고, 도성으로 오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돈이 청을 들어주지 못해서 순금띠를 늘 만지기만 하다가, 마침 [[용비어천가]]를 찬하는 일에 태종 때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찾으니 김돈이 이숙번을 추천하여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문하인 [[이징옥]], [[조비형]] 등이 고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문안하니, 자기는 의자에 남면(南面)하여 앉고 재상열에 오른 문인들은 바닥에 앉아, 마치 아이들 대하듯 했다. 이때 그 사위 김모가 이럴 수 없다고 놀라니 비로소 바닥에 앉았다. [[용비어천가]]의 일이 끝나니 세종이 다시 귀양 갔던 곳으로 복귀를 명했는데, 김돈이 석방을 주청했으나 왕은 선왕의 처사라 하면서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돈]]은 기어이 순금띠를 갖지 못했다.(세종)

위의 기술을 보면 이숙번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것같다. 역시 [[소문쇄록]]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숙번이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사치하여, 그의 첩이 절약할 것을 이야기하니까 이숙번은 그 첩을 목을 쳐죽였고, 이숙번의 아들은 방탕하여 재산을 다 탕진하고서 보따리를 지고 먼 친척집으로 가다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출처 : [기타] 김현룡, 한국문헌설화1, 건대출판부, 1998.

 

이숙번의 추락

 

술잔을 마주하고 벌어진 진실게임

지신사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비록 품계는 낮지만 왕명을 출납하는 막중한 관직이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균형감각을 잃거나 사리사욕이 끼어들면 임금의 통치행위에 누가 된다. 왕의 최측근에 있으면서 요설로 왕의 총명을 흐린다는 이유로 고려 말 정3품 밀직사를 종5품 지주사로 격하했으나 조선 건국과 함께 부활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태종 재위 18년 동안 여덟 명의 신하가 지신사 자리를 거쳐 갔다. 지의정부사로 승진한 박석명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남용하여 문책 당하거나 이관처럼 파면된 사람도 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황희도 있고 유사눌처럼 귀양 간 사람도 있다. 임금과 신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에서 부침이 심한 자리다.

유사눌은 내약방에 들여오는 약재 소합유(蘇合油) 납품사건에 개입하여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의금부에 투옥된 후 풍해도 안악으로 귀양 갔다. 하지만 이것은 구실에 불과하고 이숙번을 향한 유탄에 희생된 셈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다. 대신들의 팽팽한 세력전에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경도되어 새우등이 터졌으니 자업자득이다.

인도의 변방 소합국에서 유일하게 생산되어 소합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소합유는 한약재다.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에 들어가면 황제가 하사품을 내린다. 사향(麝香), 용뇌(龍腦), 침향(沈香) 등과 함께 그 목록에 낄 정도로 희귀한 약재다. 혈액순환을 촉진하여 중풍, 협심증에 탁월한 약효가 있는 희귀약재다.

치료 목적 외에 사기(邪氣)를 물리쳐 꿈에서 가위에 눌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오랫동안 복용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장수 한다는 설 까지 퍼져 부르는 게 값이었으며 일본을 통하여 소량이 수입되기도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지신사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 평도전(平道全)이 소합유를 내약방(內藥房)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불량품이 발견되었다. 약방대언(藥房代言) 탁신이 벌레가 생겼다는 이유로 수납을 거절하자 유사눌이 압력을 행사하여 납품을 통과시키고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면주 66필과 목면 5필을 주게 하였다. 임금이 변질된 약재로 탕제한 약을 마시게 한 것이다.

대사헌 이원의 밀계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대노하여 유사눌과 탁신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하고 의금부 제조 이천우와 허조를 불렀다.

"유사눌을 신임하였으나 나의 편견이었다. 유사눌과 같은 일은 발각 즉시 계달(啓達)하여 직책을 다하도록 하라. 옛날에 위징(魏徵)이 말하면 태종이 받아들여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었으니 임금의 허물을 포양(布揚)한 뒤에야 언관의 직책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유사눌을 사전(詐傳)한 율()은 어떠한가?"

"사죄(死罪)입니다."

"과인을 속인 유사눌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래도 사죄는 과하다. 곤장 100대를 쳐 풍해도 안악에 부처하라."

유사눌을 귀양 보낸 태종은 내약방 의원이 변질된 소합유를 폐기처분 하려하자 버리지 말고 보관하라 명했다. 변질 되었지만 꼭 쓸 곳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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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이숙번을 불렀다. 인적이 끊긴 창덕궁, 어둠이 내린 광연루에 조촐한 술상이 마련되었다. 대형 연회가 열리던 광연루에 임금과 신하가 술상을 마주하고 독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태종이 작심한 자리다. 마주 앉긴 했지만 임금과 신하이기 때문에 북면과 남면이다. 북산에 둥지를 튼 부엉이가 가끔 울어댈 뿐 고즈넉하다.

"안성군과 술 한 잔 나누고 싶어서 불렀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숙번은 임금이 내린 술잔을 예를 갖춰 받았다. 때마침 떠오른 보름달이 술잔을 가득채운 술 위에도 떠있다. 묘한 느낌이다. 조금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기생을 데리고 술 마실 때는 어여쁜 여인의 얼굴처럼 다가오던 보름달이 오늘은 그게 아니다. 마음을 열고 속내를 보여 달라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밤을 새운 것이 여러 날 이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방원 야인시절 하륜의 천거로 이숙번과 처음 만난 후, 왕업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밤을 새우던 일을 떠올리는 질문이다. 태종은 이숙번에게 또 한 차례 술을 쳐주었다. 역시 술잔에 보름달이 떠있다.

"나들이를 떠난다면서요?"

"송구스럽습니다. 몸이 찌쁘뜨 하여 온천에나 다녀올까 합니다."

며칠 전, 태종에게 일급 첩보가 접수되었다. 이숙번이 갑사 이징옥과 군사 몇 명을 대동하고 백천 온천에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괘씸했다. 신하가 군사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도 불쾌했지만 따라 다니는 장수들도 한심스러웠다. 태종 이방원이 가장 싫어하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태종은 평소 붕당을 짓고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생각했다.

"누구랑 떠나는 게요?"

"시종 몇 명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까 합니다."

이숙번은 실수하고 있었다. 임금은 신하를 상대로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면서 진실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숙번은 그걸 몰랐다. 술잔에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속내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이숙번이 나라의 정예군 갑사(甲士) 이징옥과 군사들을 시종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대단한 도발이었지만 태종은 애써 충격을 감추며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안성군이 벌써 온천에 다닐 나이가 되었소?"

"불혹을 넘겼습니다."

이 때 이숙번 나이 마흔 셋이었다.

"하하하, 그래요. 난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데..."

"황공하옵니다."

또다시 이숙번의 빈 잔에 술을 쳐주었다. 이때까지 태종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놓친 이숙번

"벌써부터 온천엘 찾아다니는 부원군에게 좋은 약재를 하나 내려 주리다. 소합유라고 아주 귀한 약재요."

"황공무지로소이다."

태종은 의약방에 명하여 버리려던 소합유를 가져오게 하여 이숙번에게 주었다. 이튿날 예궐한 이숙번이 임금을 배알했다.

"전일에 내려 주신 약은 매우 좋았습니다."

태종은 이숙번이 가소로웠다. 변질되어 벌레가 생긴 약을 먹고 좋았다니 가증스러웠다. 소합유 사건으로 귀양간 유사눌을 이숙번이 슬그머니 비호한 것 같았다. 곤장을 쳐 귀양 보낸 처사를 비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종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온천에 다녀온 후 임금의 의중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병을 핑계 삼아 입궁하지 않고 근신하고 있는 동안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이숙번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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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은 근래에 어찌하여 출입하지 않는가?"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신하들은 머리만 조아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과인에게 불경하고 무례한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태종 재위 기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이 기상재해였다. 극심한 한재에 시달렸고, 비가 왔다 하면 폭우가 쏟아져 청계천이 범람했다. 기우제를 지내고 개천을 여는 토목사업을 펼쳤지만 자연재해 앞에는 임금도 백성도 무력했다. 임금이 가뭄을 빗대어 말했지만 이숙번을 성토하라는 암시가 내려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좌대언 서선이 입을 열었다.

"지난 5월 신이 마침 강무 장소를 정하는 일 때문에 명을 받고 이숙번의 집에 이르니, 이숙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정사는 어떠한가?" 하기에 '박은이 우의정이 되었다' 하니 이숙번이 기뻐하지 않는 기색으로 '박은은 일찍이 내 밑에 있었는데 명이 통하는 자이다' 고 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금의 신하를 자신의 명이 통하는 자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사자 박은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일찍이 '붕당을 만들지 말라' 하였는데 붕당을 만들었고, 하륜이 성상께 국정을 아외는데 이숙번이 계하에 잠복하여 엿듣는 것은 반복입니다. 또한 세자를 배알하고 '이제부터 세자를 상견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니 금장의 마음이 분명합니다."

좌대언 서선의 말처럼 박은이 이숙번과 내통하고 붕당을 지었는지 아직은 몰랐다. 때문에 입에 오르내린 박은이 더 강하게 치고 나오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이다.

"예조우참의를 들라 이르라."

태종 이방원의 목소리는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긴급 호출을 받은 정효문이 부복했다.

"이숙번이 불경한 죄를 스스로 헤아리도록 연안에 나가 있도록 하라."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부리던 이숙번도 단칼이었다. 자원 안치의 형식을 취했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팽이다. 이숙번은 변명한마다 못하고 속절없이 한양을 떠났다. 이숙번이 풍해도 안악으로 유배 길에 올랐지만 조정은 들끓었다. 이숙번을 국문에 처하라는 것이다. 이숙번의 위압에 짓눌려 아무 소리 못하고 숨죽이던 원성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대사헌 김여지의 상소에 이어 우사간대부 박수기가 상소를 올렸다.

"훈구는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무릇 출입이 있게 되면 이를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이숙번은 성명으르 받아 지위가 1품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외방으로 추방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가 범한 죄를 알지 못합니다."

뒤이어 형조판서 안등의 상소와 조정의 원로대신 성석린의 주청이 올라왔다. 한결같이 이숙번을 국문하라는 것이었다.

"짐의 마음은 이미 강해졌다. 다시는 청하지 말라 이르라."

태종 이방원이 지신사 조말생을 불러 하명했다.

"이숙번의 불충하고 무례한 것이 언행에 나타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바로잡아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뚜렸이 알게 하야야 하느느데, 원훈대신을 일조에 추방하면서 그 죄를 밝히지 아니한다면 나라 사람이 이를 의심할 것이니 실로 부적절합니다."

드디어 대척점에 서 있는 하륜이 움직였다. 공격의 끈을 늦추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맞바람은 예상 가능한 바람이지만 뒤통수를 치는 역풍은 예측 불가한 바람이다. 바람을 잡았을 때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내선(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줌)은 내가 꺼낸 말이지 이숙번의 음모는 아니다. 이숙번은 천성이 광망하고 매사에 착오를 자주 일으켜 불찰이지, 실로 두 마음 먹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신을 잃는 것은 불가하다."

이숙번은 천성이 광포하고 꼼꼼히 챙기지 못하는 성미일 뿐, 근본은 역심을 품음 것이 아니므로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무덤까지 같이 가겠다는 공신들과의 약속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임금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자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며 윤허를 청했다. 임금과 신하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형조와 대간의 간원들이 퇴궐하지 않고 3일 동안 밤을 새며 이숙번의 죄를 청했다.

"이숙번은 두 번이나 사지를 같이 겪었으니 그 공이 코고 중하다. 그러나 일에는 경중이 있으니 내가 어찌 구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천천히 순리대로 하겠다."

이숙번과 함께 공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아버리를 향한 무인혁명을 성공시키던 일과 형 이방간을 치던 일을 상기하는 말이었다.

임금이 한발 물러섰다. 순리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리가 무엇인지가 문제였다. 임금의 회유에 물러설 대신들이 아니었다. 좌의정 유정현의 상소에 이어 병조판서 이원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래도 임금이 꿈쩍하지 않자 형조와 대간에서 교장하여 청했다.

"모든 대소신료가 이숙번의 죄를 청하였으나 겨우 관문 밖으로 나가도록 하니, 아직 그 연유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답답합니다. 전하계서 말씀하기를 '이숙번은 내가 자식같이 여긴다. 근래에 과실이 있어 그를 밖으로 내보내어 그가 개과하기를 기다리니 죄를 청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아들같이 하는데, 이숙번은 어찌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써 전하를 섬기지 아니합니까?

대소신료가 비록 그 범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 반드시 그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그 죄를 다스리시지 아니하고 개과하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신등이 실망하는 까닭입니다."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을 거두어라."

태종 이방원의 명이 떨어졌다. 임금이 물러선 것이다.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이 거두어졌다. 이제는 목숨이 위태롭다. 날개가 있어야 다시 날아오르르 수 있는데 이숙번의 날개가 꺾인 것이다.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이 회수되었지만 조정은 조용하지 않았다. 이숙번을 국문에 처하라는 원로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삼성과 형조의 주처어이 끊이지 않았다. 이숙번을 중죄로 다스려 엄벌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애써 외면했다. 침묵을 지키는 임금의 의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왕심을 읽어내는 귀재 하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금의 속내를 알지 못하여 부심하고 있었다.

'성상께서 이숙번을 지켜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혁명동지들과의 약속/ 하지만 삽혈맹세는 이미 깨지지 않았던가. 개과천선? 이숙번의 성격이 광포하다고 규정하지 않았는가. 천성이 광포한 자가 교정되기란 나이가 너무 굳어있다. 이용가치? 그것도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용도 폐기하여 팽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무릎을 치고 싶었지만 서두르지 않는 것이 하륜이었다.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절대 임금을 앞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었다. 반발 뒤따라가되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그의 처세술이 그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게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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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역사소설 "이방원전" 210~218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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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의 만남을 간청한 하륜

 

이방원과의 만남을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 '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

1390(공양왕 2)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 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태조 1)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 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태조 6)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륜은 정도전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악화된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1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 는 대명관계를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혁명파의 실권자기리 벌인 세력다툼이었다.

1398(태조 7) 8월에 이방원 일파의 하륜과 이숙번이 동원한 군사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정도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붙잡혀 무참히 죽었다. 그때 정도전의 나이 57세였다. 그와 함께 화를 당한 사람은 남은, 심효생(沈孝生), 박위(朴威) 등이었고, 정도전의 두 아들도 같이 참변을 당했다.

 

하륜은 고려대토호 출신

 

하륜은 고려대토호 출신

하륜은 진주(晉州)출신으로서 자가 대림(大臨)이고 호가 호정(浩亭),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었다. 그는 1357(충목왕 3)에 아버지 하윤린(河允麟)과 어머니 강씨(姜氏) 사이에 태어났다. 하윤린은 진주 하씨로서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고, 2품의 봉익대부(奉翊大夫)에까지 올랐다. 하륜의 외가는 진주 강씨로서 진주의 토착세력이었는데 그의 외삼촌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다. 하륜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진주의 대토호(大土豪)로서 고려 때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벼슬한 사람도 있었다.

하륜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여 10세에 서당에 나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이미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진주 향교에 입학했다. 그는 진주 향교에서 수학한지 5년만인 1365(공민왕 14)에 갓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과거의 좌주(座主)는 이색과 이인복(李仁復) 두사람이었다. 과거를 볼 때에 시험관을 좌주라고 하고 과거의 응시생을 문생(門生)이라 하여 평생토록 문생은 좌주를 스승으로 섬기고 좌주는 문생을 문하생으로 돌보았다. 하륜과 이색은 이러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륜은 이색의 문생으로 이색 문하의 젊은 유학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박의중 등과 교유했다. 또 자기보다 5년 아래인 권근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고, 이색과 이인복 두사람을 평생토록 스승으로 섬겼다.

하륜의 <호정집(浩亭集)>을 보면, "이숭인이 이색, 정몽주 두 선생과 이집(李集)을 초대하여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고 그 앞에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갖다 놓고 매화에 대한 시()의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나도 또한 그 말석에 앉아서 그분들이 지은 훌륭한 문장의 시구를 듣게 되었다. (중략) 얼마 안가서 이집이 병으로 돌아갔고 그뒤에 10여년 사이에 정몽주, 이숭인 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이색 선생 또한 세상을 떠나갔으므로 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지금 와서 그들과 같이 교우하던 즐거운 때를 생각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 아아! 이 슬픔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글로 미루어 보면, 후일 발간된 이색, 정몽주, 이집, 김구용의 유고집에 하륜이 서문을 쓸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유학 사상은 정몽주, 이숭인, 등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정도전 하륜 권근 등에 의하여 조선왕조의 정통 유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계룡산 도읍 반대한 하륜

좌주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케 해 조카 사위로 삼았다. 하륜의 처가는 성주 이씨로서 이인복의 조부는 이조년(李兆年)이었다. 이조년의 손자 중에 이인임과 같은 권신(權臣)이 나오면서 성주 이씨는 고려 말에 극성기를 맞이했다.

하륜의 나이 21세가 되던 1367(공민왕 16)에 처음으로 춘추관에 임명되었고, 1369 (공민왕 18)에 감찰 규정이 되었다. 25세가 되던 1371 (공민왕 20)에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일 높이 평가하여 보고한 결과, 1372(공민왕 21)에 중앙에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뒤에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5(우왕 1)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1377(우왕 3)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1379(우왕 5) 3품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드디어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에 36세가 되던 1382(우왕 8)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84 (우왕 10)에 밀직제학이 되었다.

하륜의 나이 42세가 되던 1388(우왕 14)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에 하륜은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로 쫓겨났다. 이리하여 4년동안 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후 소환되어, 45세가 되던 1391(공양왕 3)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태조 2)에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 觀察使)로 전임되고, 51세가 되던 1397 (태조 6)에 계림부사(鷄林府使)가 되고, 1398 (태조 7)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임용되었다.

이처럼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 수령관으로 떠돌아다녔다. 1393(태조 2) 12월에 하륜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충청도 계룡산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될 뻔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無學) 대사를 데리고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본 다음에 이곳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그 터를 닦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로나 하륜은 태조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도읍지는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두어야 하는데 계룡산이란 땅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북면, 서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시키면서 풍수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대강 읽어보았는데, 지금 계룡산의 지세를 본다면 산은 서북쪽으로 내려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물이 장생(長生)하는 방향을 깨뜨리고 있으므로 앞으로 쇠퇴하여 패망할 땅이니, 도읍지를 건설할 땅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는 마음이 개운치 않아 권중화(權仲和), 정도전 등을 불러서 이것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하륜의 주장대로 계룡산은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계룡산으로 천도하려는 당초의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뒤에 조선이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적에 한양을 넓은 땅 가운데 하륜은 무악(毋岳, 신촌일대)이 길지라고 주장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무악이 너무 비좁다고 반대하고, 오늘날의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하륜은 주장하기를 "한양의 무악은 지리설에도 맞는 길지이니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제일 좋습니다"하고 무악을 명당이라고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권중화, 조준을 보내 그 지세를 조사하게 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한양의 무악이 비록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업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이방원 배경으로 중앙정계 진출

 

이방원 배경으로 중앙정계 진출

태조 이성계는 직접 한양을 돌아보고 정도전이 주장한 땅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원래 이곳은 고려 숙종(肅宗)때에 남경이었는데, 고려 때에 만들어 놓은 터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그 남쪽으로 터를 더 넓혀서 잡았던 것이다.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하륜은 정도전과 한 차례 충돌했으나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하륜은 정도전 남은 일당과 대적하기 위해서 정안군 이방원을 찾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 같다.

하륜은 이방원의 배경 아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396(태조 5) 12월에 예문 춘추관 학사가 되고, 1398(태조 7) 9월에 정당 문학에 임명되었다. 그 사이에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돼 수원에 유배당했으나, 이방원이 구원하여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396년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자,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할지 여부를 묻기 위하여 비밀리에 중신들을 모아놓고 그 의견을 물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말이 없었는데, 정도전 일파는 주장하기를 "정도전을 꼭 보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때에 하륜이 홀로 주장하기를 "지금 나라가 건국 초창기를 당하여 여러 가지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못했는데 중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문책을 받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그들의 요구에 따라서 정도전을 압송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하고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면 정도전 한 사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정도전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이방원 일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양국의 비꼬인 외교관계를 한시 빨리 풀기 위해서 당사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세자 이방석의 후견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 남은 일파와 이방원, 하륜 일파가 다시 한번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에게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정도전 제거를 위한 하륜의 계획

 

정도전 제거를 위한 하륜의 계획

이처럼 나라가 곤란해지자 1396 7월에 태조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啓稟使)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가서 정도전이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입조할 수 없다고 변명하게 하였다. 계품사란 외교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서로 오해를 풀도록 특별히 보내던 사신이었다. 이때에 표전문을 지은 정탁, 그리고 그것을 교정한 권근과 노인도 등을 같이 보냈는데 하륜으로 하여금 명 태조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반대파인 하륜을 계품사로 임명한 까닭은 무었인가? 중국은 조선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하륜이 정도전의 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서 설명을 한다면 명 태조가 오해를 적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중국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였다. 이방원 일파가 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당시 이방원 일파가 중국의 집권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는 중국 관계를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결과 명나라의 고명(誥命, 왕위 즉위 승인장)과 옥새를 받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최악의 관계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륜은 표전문 작성 경위를 해명하고 정도전의 입장을 변명하여 명태조의 양해를 얻어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계비(繼妃) 강씨(姜氏) 소생의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했다. 이에 대하여 한씨(韓氏) 소생의 여러 왕자가 불평을 품었는데,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이 가장 심했다. 정도전과 알력이 심했던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날 하륜이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가니 이방원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자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은 없고, 다만 선수를 쳐서 정도전 무리를 쳐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이방원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1398(태조 7) 7월에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송별연이 열렸는데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연회석에서 여러번 술잔이 돌았는데 하륜은 술에 취한체 하면서 갑자기 술주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일부러 주안상을 뒤엎어 음식들이 이방원의 옷자락에 엎질러지게 하였다. 이방원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자 하륜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방원의 집에 이르러 하륜은 이방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급히 말하기를 "대군, 일이 급합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오늘 밤 술상이 엎질러졌던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것 입니다"하고 이방원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재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하륜을 안내하여 함께 밀실로 들어가서 난을 꾸미게 되었고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고 하륜은 이방원에게 부탁하기를 "저는 왕명을 받고 곧 임지에 가야 할 몸입니다.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멀지 않아 정릉(貞陵)으로 이장할 때에 동원할 역군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할 테니 그 사람을 불러서 큰일을 맡기십시오. 저는 이 길로 내려가서 진천(鎭川)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거든 곧 저를 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직후 이방원은 거사를 준비했다. 이방원의 심복으로 군사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숙번은 이때에 하륜이 소개했던 것이다. 그해 8월에 이숙번이 역군들을 거느리고 상경했다. 계획한대로 이숙번은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점령, 무기를 탈취하여 역군들을 무장시킨 뒤 궁궐과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남문(南門)밖에 지휘본부가 마련되었는데 그 중앙에는 이방원이 앉고 그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연락을 받고 서울로 급히 돌아온 하륜이 그 자리에 앉아서 거사를 직접 지휘했다. 마침내 반란군은 정도전의 소재를 찾아내 포위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치는 정도전을 잡아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처럼 정도전, 남은 일파는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하륜, 이숙번이 거느린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죽었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그리고 매형 이제(李濟) 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세자의 자리는 제 2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에게 넘어갔다.

 

하륜의 개혁정책 추진

 

하륜의 개혁정책 추진

1400(정종 2)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륜과 이숙번은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체포하고 박포(朴苞) 일당을 소탕하였다. 하륜은 이방원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중신을 거느리고 정종에게 가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강요했다. 정종은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1401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즉위했는데, 이 때에 하륜의 나이 55세였다.

그 이후 하륜은 태종의 가장 아끼는 신하로서 1416(태종 16) 11월에 70세의 나이로 공무를 수행하다가 정평(定平)에서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태종 시대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륜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모두 새로운 제도로 바꾸었다. 하륜이 보필하던 태종시대는 고려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로 개혁한 시기였다. 이 시대야말로 조선왕조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관제(官制)를 개혁하여 의정부(議政府) 6(六曹)를 만들고 6조에 사무를 분장했으며, 백관의 녹과(祿科)를 정하고 관등에 따라 관리들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전선법(銓選法)과 그 치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시키는 고적 출척법(考積黜陟法)을 만들어 시행하고, 70세에 정년퇴직하는 70세 치사법(致仕法)을 만들어 스스로 실천하였다. 또 각 도, , 현의 구획을 다시 정하고 고을 이름을 바꾸었는데 예를 들면 완주를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서북면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안도(永安道)로 바꾸었다.

경제적으로 각 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조세와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했다. 특히 종이 화폐인 저화(楮貨)를 통용시키려고 저화 통행법을 만들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물물 교환하거나 포화(布貨 : 삼베)를 사용했다. 사회적으로 여말선초에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양인(良人) 신분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소송 사건이 상당히 많았는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두어서 그 신분을 가려내도록 하고 공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제정하였다. 이리하여 그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착용케 하고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했다.

이처럼 조선조 5백년 동안의 기틀은 하륜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태종시대 18년동안 숱하게 많은 공신들이 제거되어으나 그는 한번도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다. 태종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집안을 몰락시킬 적에 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 등을 감싸다가 같이 연루될 뻔했다. 또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가끔 뇌물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가짐이 한결같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친척에게는 어질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성이 있었다.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사람의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오랫동안 정계에 있었으나 정적이 없었다. 도 태종도 말하기를, "하륜이 나에게 공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를 버릴 수가 없다"라며 끝까지 감싸 주었다.

그는 천성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위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1, 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어려운 문제를 결단할 때에는 남이 자기를 헐뜯거나 비난한다고 하여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396년부터 1398년 사이에 표전문 사건으로 정도전 일파와 다툴 때에도 정도전과 남은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는 정도전을 압송해야 한다고 홀로 주쟝했다. 그는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정치가였다. 1398년부터 1416년까지 19년동안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네 차례나 정승을 지냈으나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 훌륭한 정책을 거침없이 태종에게 제시했다. 조정에 물러 나와서도 그는 조정에서 논의된 비밀을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집이나 옷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또 연회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라 죽자 태종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나라에서 큰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결정할 적에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결단하여 나라를 편안한 반석 위에 둘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다면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왕권 중심과 재상 중심

 

왕권 중심과 재상 중심

정도전과 하륜은 모두 조선왕조를 창업하는데 기여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창업했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서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다같이 고려말 유명한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하륜은 피비린내나는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은 우학자로서 보수파에 반대하는 개혁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또 고려말 이색과 정몽주의 유학사상이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조선왕조로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하륜은 조선 개국공신 가운데에서 서로 비교해서 평가해야 그 비중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에 태조시대 7년동안 정권을 담당했고, 하륜은 태종시대에 17년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개혁정치는 그들의 사상에서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심기리편(心氣理篇)>, <경제문감(經濟文鑑)>,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본사상에 입각해서 덕치를 베푸는 인정(仁政)을 주장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을 잃을 때는 혁명이 온다고 믿었다. 토지 사유를 억제하여 부자의 토지겸병을 막아서 가난한 농민을 보호하고, 부세는 1/10세를 표준으로 공정하게 부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사상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재상 중심제, 감찰제도 강화, 부국강병, 전제 개혁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적극적으로해결하려는 진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주자학의 무신론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지만,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세속화하는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하여 <고려사(高麗史)>를 편찮했으나 후일 몇차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고쳐지고 말았다.

하륜은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정 보완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완성했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내용을 충실히 보충하여 <원집상절(元集詳節)> <속집상절(續集祥節)>을 저술했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체계적으로 논한 것이다. 하륜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통치자는 왕인 만큼 왕이 덕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재상은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생민(生民)들의 이해관개를 왕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와 다른 견해다. 이리하여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1(태종 1) 7월에 그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민의(民意)를 상달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문고 설치 주장

 

신문고 설치 주장

경제적으로 그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실례로 그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저화(楮貨)와 운하를 들 수 있다. 1401(태종 1) 4월에 사섬서(司贍署)를 두고 저화라는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으나 백성들은 이것을 사용하기 싫어했다. 그는 저화 통행법을 만들어 포전을 금지하고 저화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그는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라 믿었다. 그러나 태종시대 이후 일반 민중은 저화를 위면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 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바다로 통하지 않고 내지의 운하를 통해서 수송하려고 계획했다. 왜냐하면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전복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413(태종 13) 8월에 순제(蓴堤)에 제방을 쌓고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했으나 워낙 큰 공사여서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만약 이 운하가 만들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 문화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413 7월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용산강을 잇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다.

하륜은 역사에 많은 흥미를 갖고 <태조실록(太祖實錄)>, <편년 삼국사(編年三國史)>, <고려사(高麗史)>,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을 편찬했다. 그는 단군(檀君)을 나라의 조상으로 높이고 기자(箕子)와 같이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정도전이 편찬한 역사 기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도전, 남은 일파의 치적을 깎아내리고, 이방원, 하륜 일파의 행위를 미화하고 합리화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밖에도 <사서절요(四書節要)>, <동국략운(東國略韻)>, <비록촬요(秘錄撮要)> 등을 편찬했는데 그가 유학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운학(韻學), 음양지리 등 다방면에 두루 정통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하륜은 경륜이 있는 정치가로 추앙받았으나 정도전은 나라에 반역한 역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각자 그들이 처한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의 인물을 달리 평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출처 : [기타] 신동아 97.11 : 金九鎭 홍익대 교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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