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내공컬럼] 견딜 수 있는 무게



바다는 유리 조각을 부드럽게 만든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밤새 갈아내고, 아침이면 또 갈아낸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동안 유리는 그 자리에 있다. 견디는 것이다. 날카로움이 무뎌지고, 모가 나던 것이 둥글어질 때까지 파도는 쉬지 않는다. 바다는 잔인하지 않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攻人之惡,毋太嚴。要思其堪受."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이 잘못한 것을 다스릴 때에도 너무 엄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견뎌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바다가 유리를 다듬듯, 사람은 사람을 다듬는다. 너무 거세게 다듬으면 깨진다. 너무 느슨하게 다듬으면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잘못을 바로잡을 때 정의를 말한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 한다. 그러나 정의는 때로 냉혹하다. 사람의 마음은 유리처럼 단단하지 않다. 쉽게 금이 가고, 한번 깨지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정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견딜 수 있는 무게를 재는 저울이 필요하다.

자전거를 처음 타는 아이는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고 배울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런 일은 없다. 균형을 잡는 법은 균형을 잃어봐야 안다. 사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잡으며 사람은 자란다. 너무 빨리 자라라 하면 부러진다. 너무 늦게 자라라 하면 시들어버린다.

물을 담는 그릇에는 한계가 있다. 넘치면 물은 흘러내린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면 마음은 넘쳐버린다. 조금씩,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변화해야 한다. 겨울 땅이 봄을 맞을 때도 한순간에 모든 눈이 녹지 않는다. 천천히, 조금씩,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녹는다.

사람마다 계절이 다르다. 어떤 이는 한겨울을 지나고, 어떤 이는 한여름을 산다. 같은 말이라도 겨울에 듣는 것과 여름에 듣는 것은 다르다. 같은 충고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르다. 타인의 계절을 읽는 것, 그것이 먼저다.

파도는 유리를 한 번에 부드럽게 만들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인내하며 다듬는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 견딜 수 있는 무게만큼만 말해야 한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말이 될 때도 있다. 기다림이 때로는 가장 단단한 가르침이 된다.

파스칼은 말했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림을 배우라.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스스로 익어간다." 바다는 알고 있다. 유리가 부드러워지는 데 얼마나 많은 파도가 필요한지. 사람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견딜 수 있는 무게를 헤아리는 것,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지혜다.

[인생내공 컬럼 / 고전의 하얀 바탕, 현대의 조직을 품다]


논어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공자는 말한다.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바탕을 하얗게 하라.” 이 짧은 구절은 예술의 시작을 넘어 삶과 조직의 근원을 되짚게 한다. 현대인은 얽히고설킨 조직 속에서 경쟁의 무게, 관계의 틈새, 가치관의 흔들림에 시달린다. 과연 이 고전의 빛나는 지혜는 오늘날 조직관리라는 거친 캔버스에 어떤 선을 그어줄 수 있을까.

공자의 말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모든 창조와 질서가 맑고 깨끗한 바탕에서 피어난다는 깊은 뜻을 품는다. 조직관리에서 이는 투명한 소통과 뚜렷한 목표를 가리킨다. 현대의 조직은 성과에 치우친 나머지 혼탁해지고, 리더는 사람보다 숫자를 좇으며, 구성원은 믿음 대신 불안을 키운다. ‘바탕을 하얗게’ 하라는 말은 서로의 신뢰를 새롭게 쌓는 일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본질로 돌아가야 함을 일깨운다. 조직 역시 그렇다. 쓸데없는 잡음을 덜어내고 기본에 충실할 때, 비로소 조화로운 성과라는 그림이 완성된다.

예전, 작은 팀을 이끌며 이 진리를 몸으로 배웠다. 방향이 흐릿하고 말이 오가지 않자, 팀원들은 저마다 흩어졌다. 문을 열고 모두의 목소리를 모아 투명하게 길을 정한 뒤에야 하나로 뭉쳤다. 곁에 있던 동료가 툭 던진 말, “리더가 먼저 마음을 비우면 팀이 채워진다”는 공자의 구절과 묘하게 겹쳤다. 조직은 사람의 숨결이다. 리더가 하얀 바탕을 펼치면, 그 위에 각자의 색이 스며든다.

이 지혜를 삶에 녹이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리더는 열린 대화로 신뢰의 뿌리를 내리고, 팀원에게는 자신의 몫을 선명히 알 기회를 준다. 서로의 노고를 알아주는 마음을 심는 것도 잊지 말자. 더 나아가, 문제를 새롭게 보자. 갈등은 흠이 아니라 자라는 계기다. ‘하얀 바탕’은 완벽을 강요하지 않는다. 부족함을 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북돋는다. 조직이 흔들릴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듬는 태도가 필요하다.

공자의 가르침은 소박한 말 속에 큰 울림을 담는다. 복잡한 조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바탕을 하얗게’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첫걸음이다. 그러니 어지러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잠시 멈추고, 마음을 비우고, 새로 시작하라. 그 하얀 바탕 위에서 우리는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다. “조직은 하얀 종이 같아, 손을 대기 전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데서 꽃핀다.” 이 문장을 노트에 새기며 오늘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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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내공 컬럼 / 가까운 이를 기쁘게 하면 먼 이도 찾아온다]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는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면 먼 곳의 사람도 찾아온다"라는 뜻이다. 이 간결한 네 글자에는 인간관계의 본질과 영향력의 확장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현대인들은 SNS로 수천 명의 '친구'와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옆자리 동료나 가족과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간관계의 확장이 자연스러운 순서를 따라야 함을 알려준다. 큰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대형 사건을 수임하고 유력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파트너들에게만 노력을 집중했다. 내 사무실의 젊은 동료 변호사들과 법률 보조 인력들은 단지 성과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 결과 빠른 승진과 인정을 얻었지만, 중요 소송을 앞두고 팀 내 협력은 무너졌고 준비가 부실해졌다. 그때 깨달았다. 가까운 동료들의 마음조차 얻지 못한 리더십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후 나는 함께 일하는 후배 변호사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법률 보조 인력들의 노고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팀 분위기가 바뀌었고, 시간이 지나자 다른 부서와 심지어 경쟁 로펌의 변호사들도 우리 팀의 방식을 배우고자 찾아왔다.

현대인이 이 고전의 지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관계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화려하고 넓은 인맥보다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가까운 관계부터 진정성 있게 챙겨야 한다. 또한 관계를 목적이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도 필요하다.

공자의 가르침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삶에 깊은 울림을 준다. 화려한 인맥과 SNS 팔로워 수에 집착하는 시대에,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부터 진정성 있게 가꾸어 나가는 일은 역설적으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운 이에게 다가갈 때, 세상은 그 진심의 파동을 타고 당신에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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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길을 양보하다: 비움의 지혜

새벽 안개 속 좁은 골목. 한 사람과 마주치자 자연스레 한 걸음 물러선다. 그가 고개를 숙여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만 남는다. 채근담은 명확하다. "경로착처, 유일보여인행." 좁은 길에서는 한 걸음 비켜서라. 이 단순한 행동에 삶의 지혜가 담겨있다.

좁은 길은 일상 곳곳에 존재한다. 날카로운 말이 오가는 대화, 키보드 전쟁이 벌어지는 SNS, 그리고 내면의 갈등까지. 공자는 "화이부동"을 말했고, 햄릿은 결정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잠시 멈추는 법을 잊었다.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인다. 양보의 공간은 사라지고, 길은 좁아진다.

"자미농적, 감삼분양인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한 맛을 덜어 다른 이와 나누라. 어머니가 주신 떡볶이., "조금 남겨, 동생도 먹어야지"라는 말은 불편했지만 그 안에 삶의 본질이 있었다. 비움이 오히려 채움이 되는 역설. 동양의 '인'과 서양의 '카리타스'는 다른 이름으로 같은 지혜를 말한다. 이것이 공동체의 심장박동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물러섬과 나눔이 항상 옳은가? 내가 양보했는데 무심한 반응이 돌아올 때 마음은 흔들린다. 아무 기대 없이 비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지만, 그 속에도 보이지 않는 욕망이 있지 않은가? 이 역설은 나눔의 본질을 묻는다. 순수한 비움과 채우려는 욕망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다.

안개가 걷힌 골목, 좁은 길은 여전히 좁다. "한 걸음 물러서니 길이 열리고 하늘이 트이네." 물러섬은 패배가 아닌 더 넓은 시야를 여는 지혜다. 오늘, 당신은 어떤 좁은 길에서 멈춰 설 것인가? 그 선택이 당신의 하늘을 얼마나 넓힐지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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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락일고(伯樂一顧) - 천재를 알아보는 눈, 그리고 기다림의 미학]
"천리마는 상재이나 백락은 상무하다(千里馬常在 而伯樂不常有)." 한유의 『잡설』에 나오는 이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준다. 백락일고(伯樂一顧), 즉 백락이 한 번 돌아본다는 이 고사성어는 단순히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넘어,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기다림의 미학'과 '진정한 만남의 가치'를 되묻게 한다.
백락은 춘추시대 진목공 시절의 말 감정사 손양으로, 탁월한 안목으로 천마의 별자리를 뜻하는 '백락'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가 한 번 눈길을 준 말은 곧 천리마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고사의 핵심은 백락의 능력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천리마와 백락의 '만남' 그 자체에 있다.
현대 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숭배한다. 인재를 발굴한다며 수없이 많은 평가와 검증 시스템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백락의 눈'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학 입시, 기업 채용,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우리는 표준화된 잣대로 사람을 재단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진정한 천리마는 규격화된 틀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했고, 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다. 이들이 천리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가치를 알아본 '백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잡스에게는 워즈니악이, 고흐에게는 동생 테오가 있었다.
백락일고의 더 깊은 의미는 '기다림'에 있다. 천리마도 백락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말로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자신의 백락을 기다리며, 동시에 누군가의 백락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회를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갈고닦으며 때를 기다리는 능동적 기다림이다.
현대의 백락일고는 AI가 인재를 선별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놓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잠재력과 고유성이다. 진정한 백락은 겉으로 드러난 스펙이 아닌, 내면의 가능성을 본다. 한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고 믿어주는 것, 그것이 현대판 백락일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천리마이자 백락이다. 내 안의 천리마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숨은 천리마를 발견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 그것이 백락일고가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다. "진정한 만남은 서로를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리마와 백락의 만남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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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는 공부와 공부 없는 생각의 함정]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2500년 전 공자가 제자들에게 던진 이 경고는 오늘날 정보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통해 쏟아지는 무수한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정말 배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 시대에 진정한 배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의 '망(罔)'은 그물처럼 얽혀 헤어날 수 없는 혼란 상태를 뜻한다.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디지털 학습의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유튜브 강의를 몇 시간씩 시청하고, 온라인 강좌를 연달아 수강하며, 베스트셀러를 한 달에 열 권씩 읽어치우지만 정작 그 지식이 자신만의 사유 체계로 내재화되지 못한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들어오는 족족 빠져나가는 지식들. 이는 학습이 아니라 정보의 단순 통과에 불과하다.
특히 SNS 시대의 '인포데믹' 현상은 이런 무사유적 학습의 전형을 보여준다. 140자 트윗, 15초 쇼츠, 3분 요약본으로 압축된 지식을 습득하며 스스로 박학다식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깊이 없는 얕은 지식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파편화된 정보로만 남는다. 결국 많이 알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지식 빈곤' 상태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의 '태(殆)'는 위험한 편견과 독단에 빠지는 상태를 경고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현상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확증편향'과 '에코 체임버' 효과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정보 거품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반복해서 접하며, 다른 관점의 학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만 되새기며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을 '독창적 사상가'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식의 유입을 차단한 채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생각들을 창의적 아이디어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실상은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거나, 이미 수백 년 전에 논의된 낡은 관념의 반복일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창의는 폭넓은 학습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사유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시한 해법은 무엇인가? 놀랍도록 현대적인 그의 처방은 학습과 사유의 변증법적 결합이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마다 '왜 그럴까?', '내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까?', '다른 해석은 없을까?',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식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균형 잡힌 학습법의 구체적 실천 방안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책을 읽을 때는 저자와 논쟁하는 마음으로 읽고, 강의를 들을 때는 강사의 주장에 대한 반박 논리를 생각해보며, 뉴스를 접할 때는 다른 관점의 기사도 찾아 비교해보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만의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보고, 반대 의견도 적극적으로 탐색해보는 것이다.
결국 공자가 말한 진정한 배움이란 지식의 양적 축적이 아니라 질적 심화다. 하나를 배워도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체화하고, 하나를 생각해도 그것을 다양한 지식과 연결시켜 검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학습의 본질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그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이라도 더 펼쳐보자. 쉽게 납득하지 말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배움과 사유가 만나는 그 역동적 지점에서 진정한 지혜가 꽃피고, 우리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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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ing and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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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삶의 ‘주인’인가, ‘손님’인가? '수처작주'의 현대적 의미와 자기 성찰]

# 들어가며: 삶의 조타수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삶은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문득, 내 삶의 조타수가 내가 아님을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 세상의 소음 속에 표류하는 손님일 뿐이다. 아침 알람 소리에 떠밀려 하루를 시작하고,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정작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다. 스마트폰 화면 속 넘쳐나는 정보와 타인의 화려한 삶은 상대적 박탈감만을 안겨주기 일쑤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교묘하게 우리를 삶의 '손님'으로 전락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거대한 흐름에 맞서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 임제의 외침: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천여 년 전, 당나라의 임제 의현 선사는 거침없는 할(喝)과 방(棒)으로 당대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의 핵심 가르침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어느 곳에서든 주인이 되고, 지금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참된 진리의 자리이다"—으로 요약된다. 이는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안일한 위로가 아니다. 맹목적인 낙관이나 현실 도피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히 발휘하여 매 순간을 진실되게 창조하라는 준엄한 명령에 가깝다.

임제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은 이러한 주체성의 토대가 된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온갖 규정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 매 순간 새롭게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장 폴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하며 인간에게 부여한 절대적 자유와 책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그 선택의 총합이 바로 '나' 자신이다.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역시 '수처작주'의 삶과 맞닿아 있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에드문트 후설이 말한 '판단중지(epoché)'를 통해 선입견을 멈추고 사태 자체로 돌아가려는 현상학적 태도와도 통한다.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자신의 '생활세계'로 돌아와,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강조한 '신체성'을 통해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 손님의 삶 vs. 주인의 삶: 두 갈래 길

회의실, 그의 목소리는 없었다. 상사의 말은 곧 법이었고, 그는 묵묵히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퇴근길, 그는 텅 빈 껍데기였다. 스마트폰 속 타인의 삶은 화려했으나, 그의 현실은 아니었다. 주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철저히 '손님'이었다. 이러한 '손님'의 삶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 정보 과잉 속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반면, '주인'의 삶은 다르다. 가령, 직장 내 번아웃으로 무기력했던 K씨를 보자. 그는 임제의 가르침을 접한 후, 자신의 업무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하려 애썼다. 수동적으로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회의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했고, 반복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미미했던 변화가 점차 그에게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일터에서 '주인'으로 서기 시작했다.

# 과학이 밝혀낸 '주인 되는 법'

이러한 '수처작주'의 태도는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은 그 실질적 효과를 뒷받침한다. '마음챙김(Mindfulness)'은 '지금-여기'에 대한 자각을 통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서 조절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는 임제선사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데시와 라이언의 '자기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충족될 때 인간이 내적 동기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밝힌다. '수처작주'는 바로 이 자율성과 유능감을 극대화하는 삶의 방식이다.

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더욱 놀라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리가 '주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반복하면, 뇌의 회로 자체가 그 방향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 의식'은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는 능력이다. 명상과 같은 마음챙김 훈련이 주의력과 관련된 전전두피질의 기능을 활성화한다는 연구 결과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는 존 듀이가 강조한 '경험을 통한 성장'과도 맞닿아, 실천을 통해 주체성이 단련됨을 보여준다.

다시, 당신의 삶으로: 주인의 자리에 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상에서 '수처작주'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1) 매 순간의 자각: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 하루의 주인은 나다"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해보자. 식사를 할 때, 걸을 때, 업무를 할 때,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며 그 순간의 주인이 되어보자.

2) 내면의 목소리 경청: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도교의 '무위'처럼, 가장 자연스러운 내면의 답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3) 작은 성공의 경험: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좋다. 오늘 할 일 목록 중 하나를 주도적으로 완수하거나, 불편했던 상황에 대해 용기 내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작은 성공들이 모여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는 자기 확신을 키운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실용적 진리'처럼,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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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삶의 '주인'인가, '손님'인가? - 수처작주의 현대적 의미

© 2024 수처작주의 현대적 의미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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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처작주] 선택과 책임,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용기 - '작주(作主)'의 실천적 자세


새벽이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정해진 길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힌다.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빌딩으로 향한다. 선택이 아니다. 관성이다. 
임제선사는 '수처작주'라 했다.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이 말은 칼날처럼 질문을 던진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은 누구의 것인가.


선택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걷는 발이 아니라 그 길을 바라보는 눈에 있다. 남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인일 수 있고, 스스로 정한 길에서도 종이 될 수 있다. 차이는 주도권에 있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뇌는 반복된 패턴을 선호한다. 뉴런과 뉴런을 잇는 회로가 강화되어 그 길만 찾게 된다. 그러나 뇌는 변한다. 새 길을 만들면 새 회로가 생긴다. 작주의 실천은 뇌 속에 새 길을 내는 일이다.
김씨는 알람 소리와 동시에 스마트폰을 켠다. 어느 날 문득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기계의 종이 되었음을. 다음 날 알람을 끄고 그는 창을 열었다. 바람이 불었다. 작은 결정이 그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선택은 모두 어렵다. 직장을 그만둘 것인가. 꿈을 좇을 것인가. 상처 준 이를 용서할 것인가. 매일 갈림길에 선다. 선택하지 않음도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의 선택이다. 삶에 끌려가는 자의 선택이다.
작주는 결과보다 선택하는 자를 본다. 사르트르가 말했다. 선택은 자유다. 책임의 시작이다. 실패한 선택이라도 내가 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온전한 책임이다.
뇌의 변연계는 두려움을 만든다. 전전두엽은 이성을 담당한다. 두 부분이 충돌할 때 결정은 흔들린다. 명상이 선택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 충돌에서 한 발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작주의 핵심은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결과를 자랑하지 않고, 나쁜 결과를 핑계대지 않는 것이다. 실패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다음을 위한 씨앗을 찾는 것이다. 신경망이 경험을 통해 학습하듯, 인간도 선택의 결과로 성장한다.
스마트폰 화면은 깊은 늪이다. 알림은 끊임없이 울리고, 정보는 쉼 없이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알고리즘의 노예가 된다. 진정한 작주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작주의 길은 험하다. 익숙한 패턴을 버리는 일은 살을 베는 고통과 같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 삶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오늘, 어떤 선택으로 주인이 되겠는가.


수처작주.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천 년의 시간을 건너, 그 말은 여전히 살아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인으로 서는 용기를 내라.


*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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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과 행운 사이, 무한한 반전의 지혜]

도가의 핵심 문헌인 '도덕경'에는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재앙 속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 속에는 재앙이 숨어 있다"는 이 간결한 문장은 인간 삶의 본질적 양면성을 꿰뚫고 있다. 고대 중국의 현인 노자는 이 구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우리는 이 오래된 지혜를 현대의 급변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까?

재앙과 행운이 서로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이 통찰은 인간 경험의 본질적 양가성을 드러낸다. 삶은 결코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강물처럼 보이는 것에도 수많은 소용돌이가 숨어 있고, 평온한 호수 밑바닥에는 격렬한 지하수의 흐름이 존재한다. 인생은 선형적이지 않으며, 패턴은 언제나 예상을 배반한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이 원리의 작동을 선명하게 목격한다. 2020년대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은 재앙이었지만, 그 속에서 인류는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와 원격 의료의 혁신적 발전이라는 복을 얻었다. 반대로 급속한 경제 성장과 첨단 기술의 발전이라는 축복 속에서는 환경 파괴와 심화되는 불평등이라는 재앙이 자라고 있다. 재앙과 행운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노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인과론적 세계관을 넘어선다. 현대인들은 '이것이 원인이고 저것이 결과'라는 식의 단선적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나 도덕경의 이 구절은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품고 있으며, 시작이 끝을 품고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순환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인간이 재앙이라고 느끼는 것 속에 이미 행운이 자라고 있으며, 행운이라고 기뻐하는 것 속에 이미 재앙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통찰은 현대의 정신적 불안정성에 대한 처방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구절이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자는 인간에게 불변의 진리를 제시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다. 재앙 속의 행운을 발견하는 것도, 행운 속의 재앙을 경계하는 것도 결국 우리의 선택과 판단에 달려 있다. 이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는 끊임없이 양극화된 정보에 노출되며, 어떤 상황을 재앙으로만, 또는 행운으로만 규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노자의 지혜는 이런 단편적 인식을 경계하고, 모든 현상의 이면에 그 반대가 숨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고전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냉정한 낙관주의'의 태도를 제안할 수 있다. 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찾는 눈을 갖추고, 성공 속에서도 위험 요소를 경계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실직이라는 재앙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기회가 되고, 승진이라는 복은 더 큰 책임과 스트레스를 가져올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경제 위기가 혁신적 기업의 탄생을 촉진하고, 기술 발전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낳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노자의 이 구절은 우리의 삶에 어떤 실천적 지혜를 제공하는가? 무엇보다 '상황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의 재앙이 내일의 축복으로 변할 수 있고, 오늘의 축복이 내일의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더 유연하고 장기적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극단적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는 교훈도 담고 있다. 재앙 앞에서 지나치게 절망하거나 행운 앞에서 과도하게 기뻐하는 대신, 균형 잡힌 내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삶의 변화무쌍한 흐름 속에서 때로는 재앙을, 때로는 행운을 만난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이 둘을 분리된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앞으로 당신이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속에 숨은 기회를 찾아볼 수 있는가? 반대로 행운이 찾아왔을 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예견할 수 있는가? 삶의 모든 순간은 양면성을 품고 있다. "재앙과 행운은 같은 방의 다른 창문일 뿐이다."

[매사마골(買死馬骨), 죽은 말의 뼈를 산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소왕이 천리마를 구하고자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 한 신하가 나서서 천리마를 구해오겠다고 자청했고, 소왕은 천금을 주며 그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신하의 손에는 죽은 말의 뼈만이 들려 있었다. 오백 금이나 주고 산 것이었다. 화가 난 소왕에게 신하는 말했다. "죽은 말의 뼈도 이렇게 비싸게 사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천리마는 얼마나 귀하게 대하겠습니까?" 과연 1년도 안 되어 천리마 세 필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이 고사가 담고 있는 본질은 '진정성의 증명'이다. 말뿐인 약속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간절함의 무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누군가를 찾고, 동시에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한다. 그 신뢰의 다리는 어떻게 놓이는가? 바로 '매사마골'의 정신, 즉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먼저 믿음을 보여주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현대 기업들이 인재 확보에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글이나 애플이 직원 복지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말의 뼈'를 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인재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이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스타트업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신입 개발자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도, 미래의 천리마들을 부르는 나팔소리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매사마골은 단순한 투자 전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의지'다. 죽은 말의 뼈를 산 신하는 계산적이었을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계산과 진심이 하나가 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우리 삶에서도 때로는 '죽은 말의 뼈'를 사야 할 때가 있다. 실패한 프로젝트에서 배운 교훈에 값을 매기고, 좌절한 동료의 재기를 돕고,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 이는 손해가 아니라 신뢰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그 씨앗이 언젠가 천리마가 되어 돌아올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진정한 가치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있으며,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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