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탑재] 미나리, 물과 흙 사이의 침묵
물과 흙이 만나는 경계에서 자란다. 그 경계는 때로 모호하고 불안정하다.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사이에서 미나리는 뿌리를 내리고 초록의 줄기를 뻗는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미나리는 거기 있었다. 우리 밥상에, 우리 약방에, 우리 이야기 속에.
"물과 흙 사이에서 자라는 미나리처럼, 인간도 경계에 선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뿌리내리는 존재로." 삶은 그런 것이다. 경계에 서서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것.
# 뿌리와 흐름, 동에서 서로
한반도와 중국, 일본이 미나리의 고향이다. *Oenanthe javanica*. 학자들은 그렇게 부른다. 고려 때 이미 '향약구급방'에 기록됐고, 조선의 의원들은 '수근(水芹)'이라 불렀다. 물가의 미나리. 그 이름조차 단순하고 명료했다.
서양은 늦게 알았다. 19세기가 저물 때쯤, 동양의 이국적 식물로 그들의 정원에 심었다. 먹지 않고 보기만 했다. 겨우 한 세기가 지나서야 그들의 입에 들어갔다. 아시아 이민자들이 가져간 씨앗이 미국의 땅에서 자라고, 할리우드의 스크린에 오르기까지 했다.
# 눈빛의 차이, 동양과 서양
동양인의 눈에 미나리는 생명이었다. 정월 대보름, 미나리를 씹는 소리는 질병을 쫓는 주문과 같았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미나리 냄새에 젖은 편지를 보냈고, 그 향기에 어린 시절이 담겼다.
중국인들은 '수근'이라 부르며 불로장생을 꿈꿨고, 일본인들은 '세리'라 이름 붙이고 봄의 전령사로 반겼다.
한국의 시인들은 미나리를 글에 담았다. "미나리처럼 맑은 사람"이라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달랐다. 그들에게 미나리는 처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가, 나중에는 이민자들의 향수가 되었다.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상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미나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과학의 언어로 읽는 미나리
선조들은 알았다. 경험으로, 감각으로. 과학자들은 뒤늦게 증명했다. 미나리에는 비타민이 가득하다. 레몬보다 많은 비타민 C, 그리고 A와 B도 충분하다. 칼륨, 칼슘, 철은 뼈와 피를 만든다.
과학의 차가운 언어는 미나리의 성분을 분석한다. 페놀, 플라보노이드, 이소람네틴. 그 성분들은 몸속의 독을 씻어낸다. 간을 보호하고, 혈당을 조절하며, 염증을 가라앉힌다. 암세포조차 물러나게 한다. 술에 절은 간을 깨끗이 씻어내고, 도시의 매연으로 지친 폐를 달랜다.
현대 의학은 이제야 미나리의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맑은 물에서 자란 미나리가 몸을 정화한다는 것을.
# 식탁 위의 기억, 시대를 건너
한국인의 식탁에 미나리는 여러 모습으로 올랐다. 미나리 김치, 된장국에 넣은 미나리, 쇠고기와 함께 싸먹는 미나리강회. 그 향기는 봄을 알렸다.
중국인들은 미나리를 볶아 먹었고, 일본인들은 냄비에 넣었다. 베트남에서는 쌀국수 위에 띄웠다. 모두 제 방식대로 미나리를 품었다.
이제 서양의 요리사들도 미나리를 만진다. 이탈리아의 파스타, 프랑스의 생선요리, 미국의 샐러드에 미나리가 들어간다. 텍사스와 조지아의 농장에서 미나리가 자란다. 물과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미나리는 뿌리를 내린다.
# 시대를 건너 다시 만나다
바다를 건너고 세월을 넘어, 미나리는 다시 주목받는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깊어질수록,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강해질수록, 미나리의 가치는 빛난다.
서구식 식단이 가져온 병들, 현대인의 피로감, 환경오염이 만든 불안. 이 모든 것에 미나리는 답을 준다. 미나리 추출물을 넣은 약이 생겨났고, 미나리 성분의 화장품도 나왔다.
더 중요한 것은 미나리가 물을 정화한다는 점이다. 오염된 습지에 미나리를 심으면, 물이 맑아진다. 미나리가 자라는 땅은 생명력을 회복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놓친 지혜다.
물과 흙 사이, 그 경계에서 자라며 순환의 고리를 잇는 미나리. 그것은 어쩌면 인간 존재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서든 살아가는 법을 아는.
"물이 흐르는 곳이라면, 미나리는 반드시 뿌리를 내린다. 인간도 그럴 수 있다. 어떤 땅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삶은 계속된다." - 《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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