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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건진 문장 :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 중에서

지식창고/Book

by 조우성변호사 2012. 2. 2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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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건진 문장 :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 중에서



<인용문>

 

# 1

소유와 존재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는가 하는 방법의 변화는, 과거 2, 3세기 동안 서구의 여러 언어에서 ‘명사’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고 ‘동사’의 사용이 줄어드는 현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명사는 어떤 물건을 표시하는 품사다. 나는 어떠어떠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테이블을, 집을, 책을,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등의 표현을 쓴다.

동사는 어떤 행동, 또는 그 과정을 나타내는 품사이다.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미워한다 등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행동’을 ‘소유’의 측면에서 표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즉, 명사가 동사 대신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명사와 결부된 ‘소유한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그릇된 사용법이다. 과정이나 행동은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2

이 혼동이 가져온 나쁜 결과는 이미 18세기에 지적되었다.

뒤 마레(Du Marais)는 사후(死後)에 출간된 저서 《진정한 문법의 법칙》에서 이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나는 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예문에서의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은 그 본래의 뜻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예문에서의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은 모방의 방법에 의해 쓰인 것이다. 그것은 ‘빌려온’ 표현법이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또는 이런 방법으로 생각한다.’를 뜻한다.

나는 욕망을 갖는다.’라 함은 ‘나는 바란다.’의 뜻이며, ‘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나는 000하겠다.’의 뜻이다.“

 

# 3

뒤 마레 이후 200년 동안 명사를 동사 대신 쓰는 이 경향은, 그로서도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늘어났다. 정신분석의의 도움을 청하는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하자.

‘박사님, 저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불명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집, 훌륭한 아이들,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저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십년 전이라면 환자는 아마 ‘저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 ‘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또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신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라고, 그리고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 4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신에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주관적 경험은 배제된다. ‘경험의 나’가 ‘소유의 그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나는 내 느낌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무엇으로, 즉 문제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온갖 종류의 곤란에 대한 추상적 표현일 뿐이다. 나는 문제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가질 수는 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문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의 창조물에 의해 소유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법은 감춰진 무의식적 소외를 드러내고 있다.

 

<Comment>

 

동사가 아닌 명사 위주의 언어 사용이 결국은 인간 소외로 귀결될 수 있다는 식의 추론을 전개하는, 그야말로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 보았다.

 





<가지고 있다>는 그 표현이 오히려 주체적인 나를 종속적으로 대상화해서 결국은 나 자신이 소외될 수 있다는 그의 논리. 100% 이해가 가진 않지만 그의 다음 논리를 궁금하게 하는 대목이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사랑에 대해서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사람이 그 주체가 되는 내적 행동인 것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득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좀 더 깊이 정독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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