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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남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 천산돈(天山豚) 괘

지식창고/주역

by 조우성변호사 2012. 2. 2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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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남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 천산돈(天山豚) 괘


1.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의 <낙화> 중 - 



애절하게 떠나가 버린 그녀를 생각하며, 쓰린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그녀는 가야할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춰 간 것이기에,

그 뒷모습 마저도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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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것’, 그리고

‘가야 할 때에 진짜 가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탐나는 권세의 자리를 ‘두고’,

이 세상에 뭔가를 보여주리라는 욕망을 ‘두고’

떠날 수 있다는 것,

숨을 수 있다는 것.


이 때 문득 든 생각

일을 크게 벌이면서 전진하는 것과

일을 거두고 은둔하는 것.

과연 어느 경우에 더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할까?



3.

나의 지인 A.

사업상 부도로 인해 수많은 피해를 주었기에

사기죄, 부정수표단속법위반죄 등을 이유로 3년의 감옥살이 후에 출소한 다음 

세상을 향해 뭔가를 보여주려고 발버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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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무엇인가요’라는 나의 조언에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나를 떠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반드시 보이고 말겁니다’
면서 두 주먹을 불끈쥐었던 그.

하지만 그 무리함으로 인해 더 큰 일을 저지르게 되고



이제는 과연 몇 년정도 바깥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지 

그도 나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그에게는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했었는데.



4.

주역의 천산돈 괘는 바로 이런 숨음(은둔)에 대한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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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가 위에,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아래에 놓여진 괘라서 천산돈괘라고 한다.



이 형상은, 산이 아래에서 올라서려 하고, 하늘은 위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제 막 아래에서 소인들의 세력이 성장하려 하고 있고, 군자는 소인을 피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천산돈 괘사는 이러하다.


“은둔이니, 형통할 수가 있다. 조금 굳셈이 이롭다.”


그리고 이 괘사에 대한 가장 정통성 있는 풀이는 다음과 같다.


“무조건 물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굳은 마음으로 

물러나라는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소인을 멀리하되, 소인을 증오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엄격하여 소인들 스스로 범접하기 힘들게 한다.”



5.

우리는 초한지에 나오는 대조적인 두 인물을 알고 있다.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유유히 유방의 곁을 떠나서 일신을 보존한 장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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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다가 비참한 죽임을 당한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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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이 보여 준 처세를 흔히 ‘공성신퇴(功成身退 ; 공을 이루었으니 이제 

그 자리를 떠난다)’라고 하는데, 원래 이 말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것으로서, 원문은 이러하다.


功成, 名遂, 身退, 天之道.

(공성,명수, 신퇴, 천지도)

공이 이루어지고 이름도 얻었으니 몸이 물러가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노자는 공을 이루고 명예를 얻었을 때 몸이 물러가면 

그 공과 명예는 고스란히 자기 몫이 되지만 

족함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그때까지의 공과 명예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부질없는 욕망의 노예가 돼 몸까지 망치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기 계절의 공을 이루고 물러나는 것도 명예로운 일이며,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며,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이다.


6.

'주역'은 합당한 물러남의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때를 잘 알아서 스스로 물러나는 호둔(好遯),


주위의 칭찬을 받으면서 물러나는 가둔(嘉遯),


재물을 모으는 등 준비를 마친 후에 물러나는 비둔(肥遯)
이 그것이다.


물러난 이후의 생활을 미리 준비해 둔 연휴에 때를 잘 살펴서, 

남을 배려하면서 물러나는 것이 최상의 물러남이라는 설명이다.


7.

그러나 주역에서 말하는 ‘물러남’이란 완전한 은둔이나 도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벌써 한 때가 다 지났기 때문에’ 적절한 때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절한 때가 아닌 상황에서의 움직임은 화를 부르는 법,

그래서 일단은 은둔하여 ‘힘을 축적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지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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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멋지게 일을 만들어 도모하는 것보다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몸을 거두어 정리할 수 있는 것,

바로 이러한 물러남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순리를 따라 행동하는 지혜로운 사람임을

주역은 가르치고 있다.


9.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천산돈 괘를 얻게 되면


우리는 물러남의 미학을 떠올리면서

내실을 다지고 에너지를 축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 이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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