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마골(買死馬骨), 죽은 말의 뼈를 산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소왕이 천리마를 구하고자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 한 신하가 나서서 천리마를 구해오겠다고 자청했고, 소왕은 천금을 주며 그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신하의 손에는 죽은 말의 뼈만이 들려 있었다. 오백 금이나 주고 산 것이었다. 화가 난 소왕에게 신하는 말했다. "죽은 말의 뼈도 이렇게 비싸게 사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천리마는 얼마나 귀하게 대하겠습니까?" 과연 1년도 안 되어 천리마 세 필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이 고사가 담고 있는 본질은 '진정성의 증명'이다. 말뿐인 약속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간절함의 무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누군가를 찾고, 동시에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한다. 그 신뢰의 다리는 어떻게 놓이는가? 바로 '매사마골'의 정신, 즉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먼저 믿음을 보여주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현대 기업들이 인재 확보에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글이나 애플이 직원 복지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말의 뼈'를 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인재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이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스타트업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신입 개발자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도, 미래의 천리마들을 부르는 나팔소리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매사마골은 단순한 투자 전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의지'다. 죽은 말의 뼈를 산 신하는 계산적이었을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계산과 진심이 하나가 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우리 삶에서도 때로는 '죽은 말의 뼈'를 사야 할 때가 있다. 실패한 프로젝트에서 배운 교훈에 값을 매기고, 좌절한 동료의 재기를 돕고,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 이는 손해가 아니라 신뢰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그 씨앗이 언젠가 천리마가 되어 돌아올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진정한 가치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있으며,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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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약졸(大巧若拙) - 무위의 미학, 혹은 존재의 역설]

노자는 도덕경 45장에서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했다. 가장 큰 재주는 서툴러 보인다는 이 역설적 명제는 단순한 겸손의 미덕을 넘어선다. 이는 존재와 현상, 본질과 형식 사이의 근원적 긴장을 드러내는 철학적 통찰이다. 왜 진리는 늘 역설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서구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있음(being)'을 '드러남(appearance)'과 동일시해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존재는 증명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그러나 노자의 사유는 다르다. 도(道)는 이름 붙일 수 없고, 참된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 대교약졸은 이러한 도가적 인식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진정한 탁월함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본질을 보존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가 '탈은폐(aletheia)'와 '은폐' 사이의 유희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는 노자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대교(大巧)가 졸(拙)로 보이는 것은 의도적 은폐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 자체의 본성이다. 마치 빛이 어둠을 통해서만 인식되듯, 충만함은 비움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라 동시적 현존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가시화하고 수량화한다. 푸코가 말한 '감시사회'는 투명성의 폭력을 행사한다. 모든 능력은 증명되어야 하고, 모든 가치는 전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교약졸의 지혜는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에 저항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 드러나지 않는 것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이는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존재론적 저항이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해석을 거부한다.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다. 이 모든 역설 속에 대교약졸의 진리가 숨어있다. 그것은 '함'(doing)이 아닌 '됨'(being)의 차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이다. 서툴러 보일 용기, 그것이 바로 가장 세련된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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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것의 쓸모 : 하로동선]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무용함이 아니다. 한나라 때 왕충이 『논형』에서 처음 사용한 이 표현은, 때를 잃은 것들의 덧없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정말 여름의 난로는 쓸모없기만 할까? 우리는 왜 계절에 맞지 않는 것들을 그토록 성급히 무용지물로 치부하는가?

고전이 말하는 하로동선의 핵심은 시의적절함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때를 놓치면 의미를 잃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관점에는 맹점이 있다. 시간을 일방향적 흐름으로만 보는 선형적 사고다. 여름 난로가 무용하다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는 현재적 관점에서만 성립한다. 겨울이 다시 올 것을 안다면, 여름에 난로를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다. 계절의 순환을 아는 자에게 하로동선은 무용함이 아니라 선견지명의 상징이 된다.

현대 사회는 즉시성의 시대다. 트렌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유행이 지난 것들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스마트폰이 나오자 공중전화는 하로동선이 되었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자 CD는 골동품이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즉시적 유용성에만 매몰될 때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갑자기 주목받은 것이 무엇인가? 바로 평소에는 하로동선처럼 여겨졌던 마스크 공장들과 재택근무 시스템이었다.

하로동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때 아닌 것이 진정 무용한 것일까? 오히려 때 아닌 것들이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위한 대비가 아닐까? 여름 난로는 갑작스러운 한파에 대비한 보험이고, 겨울 부채는 이상 기후에 대한 준비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처럼, 때로는 시대에 뒤처진 것들이 오히려 시대를 앞서나가는 혜안이 되기도 한다. 책이 전자책에 밀려도 여전히 종이책을 고집하는 이유, 편의점 도시락이 넘쳐나도 집밥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지혜는 하로동선을 무용지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쓸모 있게 될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이다. 오늘의 여름 난로가 내일의 생명줄이 될 수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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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 드러남과 숨음의 변증법]

송곳은 자루 속에 있다. 자루는 송곳을 감춘다. 그러나 송곳의 날카로움은 자루를 뚫고 나온다. 이것이 낭중지추다.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 앞에서 모수가 한 말이다. 자루 속의 송곳처럼, 진짜 인재는 숨어 있어도 드러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있다.

모수는 자신을 송곳에 비유했다. 그런데 그가 강조한 것은 송곳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자루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필연성이었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진짜 송곳은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자루가 감싸고 있어도, 그 예리함은 저절로 밖으로 나온다. 억지로 내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뚫고 나온다. 이것이 진정한 능력의 본질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송곳이 되려 한다. SNS에서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고, 이력서에 화려한 수식어를 나열하며, 면접장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마치 자루 밖으로 송곳을 억지로 내밀듯이. 하지만 이런 송곳은 가짜다. 진짜 송곳은 자루 안에서도 그 존재를 알린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우리 시대는 과시의 시대다.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증명해야 하고, 어필해야 한다. 조용히 있으면 무능하다고 여겨진다. 자기PR이 미덕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송곳은 PR을 하지 않는다. 자루 속에서도 그 예리함으로 인해 자루가 찢어진다. 이것이 모수가 말한 낭중지추의 핵심이다.

송곳과 자루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 자루는 송곳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감춘다. 송곳은 자루 안에서 안전하지만, 그 날카로움 때문에 결국 자루를 뚫는다. 이는 모순적 관계다. 보호와 파괴, 은폐와 노출이 동시에 일어난다. 진정한 능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겸손함 속에서도 저절로 드러나고, 침묵 속에서도 말하며, 숨음 속에서도 나타난다.

모수의 비유에는 또 다른 함의가 있다. 송곳이 자루를 뚫는 것은 송곳의 의지가 아니다. 송곳의 본성이다. 송곳은 날카롭기 때문에 뚫는다. 뚫으려고 해서 뚫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우므로 뚫는다. 진정한 인재도 마찬가지다. 능력을 과시하려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기 때문에 드러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송곳'들은 사실 송곳이 아니다. 송곳 모양을 한 무언가일 뿐이다. 진짜 송곳은 조용하다. 자루 속에서도 그 예리함이 느껴진다. 억지로 내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알려진다. 이것이 진정한 능력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송곳이 되기 전에 먼저 날카로워져야 한다. 자루 속에서 단단해져야 한다.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말고, 내면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자루가 저절로 찢어질 것이다. 그때가 진정한 낭중지추의 순간이다.

모수는 결국 평원군의 인정을 받았다. 초나라로 가는 길에서 그의 변론술로 초왕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루 속의 송곳이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 증명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그를 드러낸 것이다. 진정한 능력은 언제나 그렇게 드러난다. 때가 되면, 저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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