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변수가 많은 ‘위약(違約) 권하는 사회’(?)
휴가 때 제주도로 여행가기로 하고 필요한 예약(호탤, 렌터카, 펜션)을 다 마쳤다. 그랬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부득이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될 경우 예약을 전부 취소하고 사전에 정해진 위약금(전체 계약금액의 10-15%)을 물게 된다. 생돈을 물어주는 것 같아 속이 쓰리지만 내가 약속을 뒤집은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약속(계약)을 했으면 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상대방은 손해를 볼 것인데, 이 때 상대방에게 지급하는 손해배상이 바로 ‘위약금(違約金)’이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태로 인해 당초 예정되었던 수학여행이나 대규모 공연이 취소되고 있다. 시국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모들에게 수학여행은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이벤트일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예약 취소로 여행업계, 숙박업계, 공연관련 종사자들은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취소를 당하게 된 측이 일방적으로 취소한 상대방에게 위약금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해야 손해의 일부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일선 학교 담당자들이 수학여행을 취소하고 싶어도 거액의 위약금 부담 때문에 고민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수학여행을 취소하게 된 어느 학교 교감선생님과의 가상 문답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박교감 : 지금 현재 분위기상 도저히 예정된 수학여행을 강행할 수는 없습니다. 학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여행사에 부득이 수학여행을 취소해야겠다고 알렸더니 그쪽에서는 취소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만약 취소하려면 위약금을 내라는 겁니다. 이런 국가적인 상황에서도 위약금을 물어야 하나요?
조변호사 : 당초 가기로 한 수학여행을, 상대방 여행사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면 일단 외형적으로는 우리가 계약을 위반한 것이 됩니다. 학교측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뭔가요?
박교감 : 학부모들이 원치 않구요, 또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잖습니까?
조변호사 : 여행을 가려다가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는 계약 불이행을 정당화하긴 힘듭니다. 또 사회적인 분위기 부분도, 이는 어디까지나 학교측의 입장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학교측이 자신의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여행사에게 발생하는 피해는 학교가 배상하는 것이 맞습니다.
박교감 : 하지만 이 정도면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조변호사 : 세월호 사태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수학여행에서도 우리 학생들에게 위험이 발생하리라고 예측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사고가 발생했으니 여행사 입장으로서는 안전 관리를 평소보다 더 철저히 하려고 할 테고,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더 안전한 여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교감 : 그거야 순전히 가정적인 얘기잖습니까?
조변호사 : 세월호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도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아진 것 같다는 설명도 역시 가정적이지요. 다만 만약 정부차원에서 ‘수학여행 금지’와 같은 행정지침을 내린다면, 그 지침은 학교가 불가항력을 주장할 수 있는 사유는 될 겁니다.
따라서 이번 세월호 사태를 이유로 불안감이 증폭했다거나 여론을 의식해 어떤 행사를 취소할 경우 그 취소가 당연히 정당화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취소하는 측은 자신의 이익(불안감 해소, 명성 유지)을 위해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므로, 그에 따른 비용(상대방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은 위약금의 형태로 부담하는 것이 공평에 부합한다.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가 점점 다양해지다보니 앞으로는 이런 식의 위약금 조항도 고려해 봐야 할 듯 하다.
“계약당사자 쌍방의 귀책사유로 돌릴 수 없는 사정(사고)으로 인해, 사회여론상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 어느 일방 당사자의 명성이나 업무진행에 큰 위험성을 초래할 경우 위약금 책임은 면제하기로 한다.”
1921년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는 일제강점으로 인한 절망 때문에 술을 벗삼게 된 나약한 지식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주정꾼이 된 이유가 '술 권하는 사회'에 있다고 토로하지만 그의 아내조차 그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통제할 수 없는 돌발변수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제 어떤 일로 당초 예정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지 가늠이 어려워지는 사회.
우리는 어쩌면 ‘위약(違約)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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