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이야기> 히말라야를 오르는 세르파의 하루

2024년 5월 15일 (수요일) 새벽엔 맑았으나 오후부터 구름, 강풍

새벽 한 시. 텐트 천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뒤척이다 눈을 떴다. 침낭 속 온기마저 파고드는 쿰부의 새벽 공기는 여전히 뼈를 시리게 한다. 헤드랜턴을 켜자 뿌연 입김이 허공에 흩어진다. 벌써 스물다섯 번째 시즌, 마흔여덟의 나이. 이골이 날 법도 한데, 이 살을 에는 추위와 희박한 공기는 매번 새롭다. 아마도 이 산,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려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간단히 뜨거운 차로 속을 데우고 비스킷 몇 조각을 씹었다. 산소마스크의 밸브를 점검하고, 아이젠의 날을 살폈다. 옆 텐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올해 처음으로 8,000미터급 등반에 나선 파상이다. "파상, 장비 꼼꼼히 챙기고, 서두르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건넸다. 저 녀석의 빛나는 눈을 보면 내 젊은 날이 떠오른다.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내가 처음 포터 일을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내 어깨의 짐을 한 번 더 조여주셨을 뿐이었다. 그 등반이 아버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로체 페이스에서… 아, 또 그 생각이다.

새벽 두 시, 우리는 캠프 3(7,162m)를 나섰다. 고객 팀보다 한 시간 먼저 출발해 길을 살피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등에는 산소통과 텐트 일부, 식량까지 족히 20kg은 넘는 짐이 매달려 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가파른 빙벽을 오른다. 고정 로프에 주마(등강기)를 걸고 한 발 한 발, 얼음을 찍는 아이젠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간간이 저 멀리서 들리는 낙빙 소리는 언제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예전엔 이맘때쯤이면 얼음이 제법 단단했는데, 요즘은 푸석푸석해요, 앙 다이(형님)." 파상이 뒤에서 헐떡이며 말했다. "그렇지. 국제통합산악개발센터(ICIMOD)의 2023년 보고서를 보니, 지구 온난화로 히말라야 빙하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녹고 있단다. 금세기 말에는 80%까지 사라질 수도 있다더군. 그러니 등반 루트는 더 위험해질 수밖에." 변덕스러워진 날씨와 불안정한 설벽은 베테랑인 나에게도 매번 새로운 숙제다.

일곱 시가 가까워지자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로체 페이스 중간쯤, 잠시 숨을 고르며 바라보는 히말라야의 여명은 장엄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하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가 싶다가도, 문득 카트만두에 있는 가족들 얼굴이 떠오른다. 대학생이 된 큰딸, 축구선수가 꿈인 아들, 그리고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막내딸. 이 녀석들 학비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이 위험한 줄타기를 멈출 수가 없다. 한 기사에서 보니, 우리 같은 세르파의 에베레스트 작업 중 사망률이 미군이 전쟁터에서 겪는 것보다 10배나 높다고 하더라 (Outside Magazine, 2014년 자료 인용). 하지만 우리가 버는 돈은 네팔 평균 소득의 몇 배가 넘으니, 가족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줄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정오 무렵, 옐로우 밴드를 지나 제네바 스퍼의 가파른 바위 구간에 들어섰다. 고도가 7,600미터를 넘어서자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한 걸음 옮기기가 천근만근이다. "앙 다이, 괜찮으십니까?" 파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다. "괜찮다. 이 고비만 넘기면 사우스콜이 코앞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젊은 시절에는 이 정도는 거뜬했는데. 이제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감에 문득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밀려온다. 이번 시즌만 무사히 마치면… 아내와 약속했던 작은 롯지를 열 수 있을까.

오후 네 시, 드디어 사우스콜(7,906m)에 도착했다. ‘죽음의 지대’로 불리는 이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매서운 바람이 텐트를 금방이라도 날려 버릴 듯 울부짖는다. 해발 8,000미터에 가까운 이곳은 산소 농도가 해수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인간의 신체는 서서히 기능을 잃어간다. 심각한 고산병, 뇌부종, 폐부종의 위험이 언제든 덮칠 수 있는 곳이다. 고객들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치고 눈을 녹여 물을 만들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고객 한 명의 얼굴이 창백하다. 그의 산소마스크를 점검하고 상태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여기서는 누구나 힘듭니다.“

저녁으로 뜨거운 수프와 건조밥을 간신히 넘기고, 내일 새벽 있을 정상 공격을 위해 장비를 최종 점검했다. 텐트 밖은 여전히 강풍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하늘은 거짓말처럼 별들로 가득하다. 침낭에 누워 낡은 가족사진을 꺼내 보았다. 막내딸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준 편지를 읽으니 웃음이 나면서도 코끝이 시큰해진다.

이 산은 내게 삶의 터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다. 때로는 신의 얼굴을, 때로는 악마의 얼굴을 보여주며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이지만, 서로의 어깨에 기대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그 안에서 반짝이는 삶의 조각들을 발견한다. 내일, 나는 또다시 저 신들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딜 것이다. 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 산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그것이 내가, 그리고 우리 셰르파가 살아가는 이유일 테니까. 이 숭고한 봉우리들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한, 우리의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슬픔과 맞닿아 있을지라도, 결국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여정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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