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것의 쓸모 : 하로동선]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무용함이 아니다. 한나라 때 왕충이 『논형』에서 처음 사용한 이 표현은, 때를 잃은 것들의 덧없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정말 여름의 난로는 쓸모없기만 할까? 우리는 왜 계절에 맞지 않는 것들을 그토록 성급히 무용지물로 치부하는가?
고전이 말하는 하로동선의 핵심은 시의적절함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때를 놓치면 의미를 잃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관점에는 맹점이 있다. 시간을 일방향적 흐름으로만 보는 선형적 사고다. 여름 난로가 무용하다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는 현재적 관점에서만 성립한다. 겨울이 다시 올 것을 안다면, 여름에 난로를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다. 계절의 순환을 아는 자에게 하로동선은 무용함이 아니라 선견지명의 상징이 된다.
현대 사회는 즉시성의 시대다. 트렌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유행이 지난 것들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스마트폰이 나오자 공중전화는 하로동선이 되었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자 CD는 골동품이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즉시적 유용성에만 매몰될 때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갑자기 주목받은 것이 무엇인가? 바로 평소에는 하로동선처럼 여겨졌던 마스크 공장들과 재택근무 시스템이었다.
하로동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때 아닌 것이 진정 무용한 것일까? 오히려 때 아닌 것들이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위한 대비가 아닐까? 여름 난로는 갑작스러운 한파에 대비한 보험이고, 겨울 부채는 이상 기후에 대한 준비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처럼, 때로는 시대에 뒤처진 것들이 오히려 시대를 앞서나가는 혜안이 되기도 한다. 책이 전자책에 밀려도 여전히 종이책을 고집하는 이유, 편의점 도시락이 넘쳐나도 집밥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지혜는 하로동선을 무용지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쓸모 있게 될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이다. 오늘의 여름 난로가 내일의 생명줄이 될 수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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