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 선택과 책임,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용기 - '작주(作主)'의 실천적 자세


새벽이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정해진 길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힌다.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빌딩으로 향한다. 선택이 아니다. 관성이다. 
임제선사는 '수처작주'라 했다.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이 말은 칼날처럼 질문을 던진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은 누구의 것인가.


선택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걷는 발이 아니라 그 길을 바라보는 눈에 있다. 남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인일 수 있고, 스스로 정한 길에서도 종이 될 수 있다. 차이는 주도권에 있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뇌는 반복된 패턴을 선호한다. 뉴런과 뉴런을 잇는 회로가 강화되어 그 길만 찾게 된다. 그러나 뇌는 변한다. 새 길을 만들면 새 회로가 생긴다. 작주의 실천은 뇌 속에 새 길을 내는 일이다.
김씨는 알람 소리와 동시에 스마트폰을 켠다. 어느 날 문득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기계의 종이 되었음을. 다음 날 알람을 끄고 그는 창을 열었다. 바람이 불었다. 작은 결정이 그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선택은 모두 어렵다. 직장을 그만둘 것인가. 꿈을 좇을 것인가. 상처 준 이를 용서할 것인가. 매일 갈림길에 선다. 선택하지 않음도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의 선택이다. 삶에 끌려가는 자의 선택이다.
작주는 결과보다 선택하는 자를 본다. 사르트르가 말했다. 선택은 자유다. 책임의 시작이다. 실패한 선택이라도 내가 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온전한 책임이다.
뇌의 변연계는 두려움을 만든다. 전전두엽은 이성을 담당한다. 두 부분이 충돌할 때 결정은 흔들린다. 명상이 선택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 충돌에서 한 발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작주의 핵심은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결과를 자랑하지 않고, 나쁜 결과를 핑계대지 않는 것이다. 실패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다음을 위한 씨앗을 찾는 것이다. 신경망이 경험을 통해 학습하듯, 인간도 선택의 결과로 성장한다.
스마트폰 화면은 깊은 늪이다. 알림은 끊임없이 울리고, 정보는 쉼 없이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알고리즘의 노예가 된다. 진정한 작주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작주의 길은 험하다. 익숙한 패턴을 버리는 일은 살을 베는 고통과 같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 삶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오늘, 어떤 선택으로 주인이 되겠는가.


수처작주.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천 년의 시간을 건너, 그 말은 여전히 살아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인으로 서는 용기를 내라.


* 인포그래픽
https://claude.ai/.../bd5ba338-55c0-4742-a5a5-a0783b1f64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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