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내공매거진 78

궁신접수(躬身接受)

[에세이 / 궁신접수(躬身接受)] "아무리 훌륭한 찻잔이라도 물을 받기 위해선 주전자 아래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시대 제갈량에게서 유래했다는 '궁신접수(躬身接受)'는 이처럼 몸을 낮추어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뛰어난 지략가로 명성이 높았던 제갈량이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사람과 지식을 대했다는 일화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더욱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동양의 지혜를 보여준다. 겸손이라는 덕목은 단순히 예의를 갖추는 형식적 태도가 아니라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되는 본질적 가치이다. 자신을 비우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여백을 만든다. 마치 그릇의 본질이 비어있는 공간에 있듯, 인간의 가치도 스스로를 비울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나기 전 초가삼간에서..

방황의 소유권

[방황의 소유권] "헤맨만큼 내땅이다." 이 소박한 명제 속에는 인생의 깊은 역설이 담겨있다. 우리는 흔히 효율성과 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지름길만을 찾는다. 그러나 인간은 길을 잃을 때 비로소 자신의 영토를 넓힌다. 목적지에 이르는 최단거리만을 알고 있는 자는 그 직선 위에서만 세상을 보지만, 헤매는 자는 예기치 않은 풍경들을 만난다. 이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가까운 진실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장을 거닐며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 순간부터 인류의 지적 모험이 시작되었으니, 결국 우리는 무지를 자각하는 방황 속에서 지혜의 영토를 확장해왔다. 동양의 노자는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大器晩成)"고 했다. 이는 시간을 들여 방황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위대함의 전제조건임을 ..

떠난 자의 침묵, 그 무게에 대하여

[사마천 사기 인문학] 떠난 자의 침묵, 그 무게에 대하여 역사의 뒤안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중 유독 무게를 갖는 것은 때로 요란한 외침이 아니라 침묵일 때가 있다. 사마천은 일찍이 "군자는 교제를 끊어도 악담을 입에 담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군주의 허물을 들추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君子交絶不出惡聲 忠臣去國不潔其名)"고 했다. 이는 단순히 헤어짐의 예법을 넘어, 인간의 품격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인간사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이해(利害)로 얽혔던 관계가 틀어지고, 믿었던 마음이 돌아설 때, 우리는 종종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여 상대의 허물을 들추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마천이 말하는 군자와 충신은..

빗속에서 춤추는 법

[에세이 / 빗속에서 춤추는 법] 장대비가 쏟아진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상은 온통 회색빛 물줄기 속에 잠긴다.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건물 안으로 황급히 몸을 숨긴다. 비를 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오랜 관성이었다. 그런데 저기, 텅 빈 광장 한가운데서 누군가 비를 맞으며 서 있다. 아니, 몸을 흔들고 있다. 춤이다. 저것은 환희인가, 절망인가? 빗속에서 춤을 춘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서양의 어느 작가는 말했다.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폭풍우.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비바람의 연속인 것을. 우리는 늘 폭풍이 멎기를,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숨죽여왔다. 내일의 맑은 날을 위해 오늘의 궂은 날을 견디는 ..

디테일이라는 풍경

[에세이 / 디테일이라는 풍경] 사람들은 왜 관계에 문제가 생길지 알면서도 반복하는가. 디테일을 놓친다. 화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보다 디테일에 예민한 사람이 관계를 오래 유지한다. 이상하게도 이게 모든 관계의 법칙이다. 나는 어제 친구의 눈빛이 변했다는 걸 알아챘다. 미세한 떨림.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그 떨림 속에 다 있었다. 큰 선물보다 작은 관찰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게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큰 일은 이성으로 처리한다. 머리가 개입한다. 결혼, 이사, 취업 같은 큰 일은 계획을 세우고 차분히 진행한다. 하지만 작은 일은 다르다. 의도적으로 한 방향을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느낀다. 상대방이 커피를 건네며 한 말, 엘리베이터에서 스친 시선, 메시지 끝에 찍힌 마침표..

비오는 날의 우산 - 베품에 관한 단상

[에세이 / 비오는 날의 우산 - 베품에 관한 단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우산이 펼쳐진다. 검은 천 아래 가려진 얼굴들, 그 아래서도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 문득 생각한다. 우산이란 무엇인가? 비를 피하기 위한 도구라고?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산은 누군가에겐 안식이고, 누군가에겐 짐이다. 햇볕이 쏟아지는 날에는 무거운 짐에 불과하지만, 비가 내리는 순간 가장 귀한 보물로 변모한다. 이것이 바로 '때'의 마법이다. "비 올 때 우산 빌려주는 사람 없다"는 옛말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꼬집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건네는 작은 도움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 평온한 날의 화려한 선물보다, 폭풍우 속의 한..

놓아야 잡히는 세상

[에세이/ 놓아야 잡히는 세상]주식 차트를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붉은 직선. 그것은 마치 희망이 추락하는 궤적과도 같았다. '손절'이란 무엇인가? 손해(損)를 보더라도 과감히 끊어내는(切) 행위. 그러나 그 단순한 경제 용어 속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우리는 흔히 '잡는 것'의 가치만을 알고 산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오래 붙들고, 더 깊이 집착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놓는 것'이 더 큰 지혜일 수 있다. 꽉 쥔 주먹 안에는 모래알만 남고, 물은 모두 빠져나간다. 놓아야만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는 법. 손절이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단인 것이다.동양의 노장사상에서..

이별의 미학에 대하여

[에세이/ 이별의 미학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처음'을 찬미하고 '마지막'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새해 첫날에는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하면서도,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과 아쉬움만 느끼는 것처럼. 시작은 화려한 축포로, 끝은 쓸쓸한 빈 술잔으로 비유되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첫인상이 아니라 마지막 인상이다. 백 번의 웃음보다 마지막 한 번의 눈물이 더 오래 기억되는 법. 이것이 인간 정서의 비대칭성이다. 중국 속담에 '유연천리 래상회, 무연대면 불상봉'이라 했으니, 만남은 운명이요, 이별은 선택이다. 운명은 거부할 수 없지만,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니 이별의 방식에 우리의 인격이 더 깊이 반영되는 것은 아닐까? 음식물에 유통기한..

목계지덕의 심연 - 흔들림 없는 마음

[목계지덕의 심연] 『장자』 달생편에 등장하는 목계지덕(木鷄之德)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신적 경지를 암시한다. 주나라 선왕이 투계를 좋아하여 기성자에게 명하니, 그는 열흘이 지나 아뢰었다. "이제 닭이 거의 준비되었습니다. 다른 닭들이 울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 열흘이 지나 말하길, "다른 닭들이 보여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열흘 후, "다른 닭이 덤벼도 눈빛이 변하지 않고 발을 움직이지 않으니, 형체는 나무닭과 같으나 그 덕은 이미 온전합니다(形似木鷄 而有德)." 세상은 어지럽다. 천하를 달구는 시비와 소음 속에서 인간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욕망한다. 혈기(血氣)로 이루어진 육체는 외부의 자극에 흔들림이 없을 수 없다. 장자가 말한 목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 ..

군자는 화이부동 한다 : 논어적 해석과, 삶의 자세

[군자는 화이부동 한다: 논어적 해석과, 삶의 자세] 사람은 끝내 홀로다. 사람은 끝내 함께다. 이 모순 속에 우리의 삶이 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한다.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이 말은 겉으로는 단순하나 그 안에 깊은 물이 고여 있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동화되지 않고, 소인은 동화되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이는 논어 자로편(子路篇) 십삼장(十三章)에 기록된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군자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답한 구절이다. 화(和)는 조화요, 동(同)은 동일함이다. 조화와 동일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화(和)는 음악에서 각기 다른 음이 어울려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는 것과 같다. 서로 다른 음색과, 다른 높낮이를 가진 소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