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결, 아스팔트 밑에도 흐르는 엘랑 비탈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 한 뼘, 그 냉랭한 침묵을 송곳처럼 뚫고 여린 싹 하나가 파르르 고개를 내민다. 저 작고 연둣빛 몸짓 속에 담긴 거대한 생명의 약동. 이것을 일찍이 서양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Élan vital)’이라 불렀던가. 그저 살아있음이 아니라, 살아 ‘내려는’ 의지,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려는’ 창조적 충동이라고 했던가. 그것은 과연 무엇이며, 숨 막히는 현대의 잿빛 도시 속에서도 여전히 숨 쉬고 있는가?
엘랑 비탈. 그것은 정교한 설계도에도 없고, 치밀한 알고리즘에도 입력되지 않은 움직임이다. 예측 가능한 톱니바퀴의 반복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살아있는 불꽃, 스스로 길을 찾는 물줄기다. 갓난아이의 눈망울에서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왜?”라는 질문의 폭포수, 텅 빈 캔버스 앞에서 고뇌하던 화가의 붓 끝에서 일순간 폭발하는 창조의 몸짓, 한낱 풀포기지만 기어이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비집고 솟아나는 질경이의 끈질긴 외침. 이 모든 것이 엘랑 비탈의 다른 이름 아니겠는가. 어쩌면 매일 아침 무심코 흥얼거리는 콧노래 한 가락,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 속에도 그 편린은 숨어 있을 터이다.
우리는 흔히 이성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숫자로 모든 것을 환원하려 든다. 효율과 합리라는 이름 아래, 생명의 고유한 리듬과 예측 불가능한 약동은 종종 거추장스러운 것, 통제 불가능한 위험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데이터가 신이 되고, 알고리즘이 미래를 점지하는 시대. 그러나 보라.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저 작은 싹이 품은 생명의 경이, 그 근원적 힘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창조할 수는 있던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은 계산된 결과물이 아니라, 문득 찾아오는 영감, 이유 없는 기쁨, 넘치는 활력과 같은 ‘엘랑 비탈’의 순간들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지하수맥과 같아서, 메마른 아스팔트 문명 아래서도 끊임없이 흐르며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샘솟아 오르려는 힘이다.
어쩌면 우리네 ‘흥’이나 ‘신명’ 또한 이 엘랑 비탈과 깊이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계획되지 않았기에 더욱 뜨겁고,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 더욱 자유로운 에너지. 서양의 엘랑 비탈이 개별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추동한다면, 우리의 ‘흥’은 공동체적 에너지로 분출되어 함께 춤추고 노래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이는 어쩌면 동양의 도가(道家)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만들고 다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 생명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혹은 만물이 서로 기대어 살아 숨 쉬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불교의 연기(緣起)적 세계관 속에서도 엘랑 비탈의 메아리는 들려오는 듯하다. 고정된 실체가 아닌, 부단한 생성과 소멸, 그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생명은 비약한다.
그러나 이 거침없는 생명의 힘, 엘랑 비탈을 우리는 그저 찬양만 할 수 있을까? 통제되지 않는 약동은 때로 파괴의 얼굴을 하기도 한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산불처럼, 혹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도시의 확장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예측 불가능한 힘과 우리는 어떻게 춤을 추어야 하는가? 길들이려 할수록 그것은 본성을 잃고 시들거나, 더욱 거센 반작용으로 터져 나올 뿐이다. 마치 샘솟는 물길을 억지로 막으면 옆으로 터져 나오듯 말이다.
오늘, 당신의 엘랑 비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숨 쉬고 있는가? 혹시 잊고 지낸 것은 아닌가?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이름 모를 들꽃처럼, 문명의 정교하고 차가운 구조물 아래서도 여전히 꿈틀대는 원초적 생명의 외침에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계산기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만, 엘랑 비탈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정답 사회는 안전할지 모르나, 물음표가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황량한 사막인가. 저 작은 싹이 온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듯, 우리도 생명의 비약을, 그 예측 불가능한 자유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가슴 뛰며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 해답은 거창한 이론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가장 깊은 곳,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심장 박동 속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명의 숨결, 엘랑 비탈
닫힌 시스템 안에서도 길을 찾는 생명의 창조적 약동
엘랑 비탈의 의미
엘랑 비탈(Élan vital)은 단순한 생명 현상이 아닌, 살아가려는 의지와 창조적 충동을 의미합니다. 철학자 베르그송이 제시한 이 개념은 기계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생명의 역동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스스로 길을 찾는 생명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모든 순간에는 이 엘랑 비탈의 에너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생명과 기계의 대비
현대 문명의 경직성
현대 사회는 효율과 합리라는 이름 아래 생명의 고유한, 예측 불가능한 리듬을 억압합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우리 삶의 새로운 신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을까요?
아스팔트 아래 생명력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아스팔트 아래에도 생명의 물줄기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계획되지 않은 곳에서 솟아나는 작은 식물처럼, 생명의 창조적 에너지는 결코 완전히 통제될 수 없습니다.
동서양의 생명관
엘랑 비탈은 서양 철학의 개념이지만, 동양 철학의 여러 개념과도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한국의 '흥'과 '신명'
계획되지 않았기에 더욱 뜨겁고,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 더욱 자유로운 에너지인 '흥'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에너지로 분출됩니다.

도가의 '무위자연'
억지로 만들고 다듬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도가적 세계관은 엘랑 비탈과 맞닿아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緣起)'
만물이 서로 기대어 살아 숨 쉬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불교의 세계관에서도 엘랑 비탈의 메아리가 들립니다.
"계산기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만, 엘랑 비탈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정답 사회는 안전할지 모르나, 물음표가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황량한 사막인가."
'인생내공매거진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처작주'의 현대적 의미와 자기 성찰 (1) | 2025.05.17 |
---|---|
깜, 딱지의 철학 (1) | 2025.05.17 |
승자 없는 게임의 시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2) | 2025.05.16 |
자기가 중심이 되라 (0) | 2025.05.16 |
궁신접수(躬身接受) (0) | 2025.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