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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변호사의 협상 다이아몬드 모델 사례분석(7) 미대사관 인질구출 협상

협상/협상하는인간

by 조우성변호사 2012. 4. 1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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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변호사의 협상 다이아몬드 모델 사례분석(7) 

미대사관 인질구출 협상


1) 1979년 1월 이란의 팔레비 왕은 휴양을 이유로 출국(사실상은 망명이었다)하고, 그 해 2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과도 정부를 붕괴시키고 6월 신권적(神權的) 지배의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2)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이란 혁명 정부의 경직된 입장을 오판하여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왕의 입국을 허가함으로써, 이란 측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그를 확인코자 의사단의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3)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도중 미대사관에 난입 · 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 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함으로서 미·이란 인질 사태의 막이 올랐다.


4) 이란 정부는 급진 강경파가 주도하여, 미국과 일전불사의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에 이란이 대미 석유 금수 조치, 이란의 재미 예금 전액 인출 및 재이란 미국 투자의 국유화 조치에 미국이 재미 이란 공적 자산(公的資産) 동결조치로 맞서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해·인도양에서 미국의 해군력에 의한 무력 시위가 전개되었다.


5) 국제 연합을 중심으로 한 중재 노력도 무산되는 가운데 1980년 4월 미국은 특공대를 투입, 무력에 의한 인질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계획 차질과 항공기 충돌사고로 일부 특공대원이 사망, 실패로 끝났다.


6) 악화일로를 치닫던 인질 사태는 1980년 9월 다소 유화된 호메이니의 요구 조건 제시로 돌파구가 마련되었고, 미국의 협상 제의가 거듭된 가운데, 마침내 알제리의 중재로 양국간 간접 협상이 진행되어 미국이 동결된 팔레비 왕정 당시의 재미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 1981년 1월 사건 발생 444일 만에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인질 전원을 석방함으로써 미·이란 인질사태는 종식되었다.

7) 그런데 당시 이란과 미국의 협상이 이루어진 데에는 카터와 레이건의 굿가이 뱃가이 협상전술이 제대로 먹혔다는 평가가 많다.


8) 카터 대통령은 재선을 노리고 198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지명되었으나 1980년 11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완패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카터는 이란의 호메이니 측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이라면 이 문제를 나와 해결하겠소. 1월에 새로 들어오는 팀과 어떻게 해결해 보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소. 백악관에 들어올 사람들을 봤소? 대통령은 전직 카우보이 배우인데, 자신이 존웨인인 양 세계의 정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부통령은 전직 CIA 국장이고, 국무장관은 강경하기로 소문난 알렉산더 헤이그요. 이들은 세상 누구보다 과격하오. 그들이 어떻게 할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레이건도 이 전술에 동참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이 사건을 카터와 해결하겠소. 카터는 점잖은 양반이오. 내가 백

악관에 들어간 뒤에 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당신은 틀림없이 좋아하지 않을 거요.”

 


9) 결국 레이건이 공식적으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81년 1월에 이란 인질사태가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카터와 레이건의 굿가이 뱃가이 전술이 절묘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 협상 다이아몬드 모델을 적용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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