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귀, 보는 눈, 그리고 잊혀진 밟는 발]

한나라 유향은 일찍이 《설원》에서 귀로 들음은 눈으로 봄만 못하고, 눈으로 봄은 직접 경험함(발로 밟음)만 못하다 했다. "夫耳聞之, 不如目見之; 目見之, 不如足踐之." 심플하기 그지없는 이 구절은 오늘날, 정보의 폭포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손 안의 작은 유리 조각은 지구 반대편의 속삭임까지 들려주고, 이름 모를 타인의 일상까지 눈앞에 펼쳐 보인다. 듣는 것은 순식간이고, 보는 것은 클릭 한 번이면 족하다. 바야흐로 이청득심(以聽得心)과 목격담(目擊談)의 시대, 아니 이청득정(以聽得情)과 목격담(目擊談)의 과잉 시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정녕 그러한가? 귀로 들은 타인의 불행이, 눈으로 본 재난의 이미지가, 발로 직접 그 땅을 밟고 선 자의 경험과 같을 수 있는가? 우리는 스크린 속 타인의 눈물에 '좋아요'를 누르지만, 그 눈물의 짠맛이나 그를 일으킨 절망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수많은 명소와 유적지를 '보았노라' 말하지만, 그 공간을 감싼 공기의 밀도, 흙먼지의 냄새, 혹은 길바닥 돌멩이의 촉감을 느껴보지 못했다. 듣고 보는 행위가 손쉽게 복제되고 확산될수록, '밟는' 행위는 점점 더 희귀해지고 고독해진다.

발로 밟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을 넘어선다. 발바닥으로 땅의 기운을 느끼고, 울퉁불퉁한 지형에 몸의 균형을 맞추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새기는 행위다. 발은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만나고, 가장 현실적인 무게를 감당한다. 발로 밟는다는 것은, 정보의 파편이 아니라 존재의 총체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보고 들은 것을 비로소 '나의 것'으로 만드는 치열한 과정이자,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쓰는 육체적 서사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많은 '대리 경험'으로 채우고 있는가? 여행 유튜버의 영상으로 세계 여행을 하고, 게임 캐릭터의 성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며, 타인의 서평으로 책의 내용을 '안다'고 말한다. 듣고 보는 행위가 압도적으로 쉬워진 반면, 발로 밟는 행위는 수고롭고 비효율적인 구시대의 유물처럼 치부된다. 그러나 진정한 앎, 살아있는 지혜는 여전히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지식의 허기증에 시달리면서도, 정작 삶이라는 광활한 대지를 발로 밟으며 우물을 파는 수고는 기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듣기'와 '보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밟기'의 감각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발바닥에 박힌 작고 거친 현실의 파편들을 통해 얻는 단단한 지혜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맨발로 흙을 밟는가? 익숙한 길 대신 낯선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가? 듣고 보는 것을 넘어, 기꺼이 발을 더럽히고 땀 흘리며 온몸으로 세상을 '경험'하려 하는가?

한나라의 옛 현자는 이미 2천년 전에 알았다. 앎의 궁극은 '발'에 있음을. 귀와 눈으로 얻은 세상은 피상적이지만, 발로 밟아 체득한 세상은 내 살과 뼈가 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정녕, 나의 두 발은 어디를 밟고 서 있는가? 어쩌면 진정한 지식의 길은 여전히 스크린 너머가 아닌, 발밑의 땅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앎의 단계: 듣는 귀, 보는 눈, 그리고 잊혀진 밟는 발

👂
듣는 귀

정보의 시작, 빠르고 간편하지만 피상적입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
보는 눈

시각 정보는 더 생생하지만, 여전히 스크린 너머의 세상입니다. 감각의 깊이와 현실의 무게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
밟는 발

진정한 앎과 지혜의 시작.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며 세상과 나를 연결합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치열한 배움의 과정입니다.

현대 사회는 듣고 보는 정보에 압도되어 있지만, 진정한 이해는 직접 발로 밟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잃어버린 '밟기'의 감각을 되찾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