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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관제, 권력의 냉혹한 생리를 드러낸 정치사의 거울

조우성2 2025. 6. 4. 12:22

[개념탑재] 엽관제, 권력의 냉혹한 생리를 드러낸 정치사의 거울

권력이란 본디 배타적이다. 그것은 나누어짐을 거부하고, 절대성을 추구하며, 때로는 잔혹하리만치 완벽한 교체를 요구한다. 19세기 미국에서 본격화된 엽관제(Spoils System)야말로 이러한 권력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제도적 장치였다. "승자가 전리품을 차지한다"—이 한 마디로 요약되는 냉혹한 논리 앞에서, 수많은 공직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고, 또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엽관제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인간 사회의 원초적 권력 구조와 만나게 된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이 측근을 요직에 앉히던 관례에서,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이 가신들에게 영지를 하사하던 전통에 이르기까지, 권력자가 바뀌면 그 주변 인물들도 함께 바뀌는 것은 거의 자연법칙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것이 제도화된 것은 1829년 앤드루 잭슨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무려 700여 명에 달하는 연방 공무원을 일거에 교체하며 "민주주의적 순환"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 교체의 양상은 저마다 다른 색깔을 띠었다. 중국에서는 과거제라는 능력주의적 관료 선발 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바뀔 때마다 환관 세력과 측근들의 대대적인 숙청과 교체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사림파와 훈구파가 번갈아 집권할 때마다 '당색'에 따른 관리 임용이 관례화되었다. 서구에서는 어떠했는가.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이 정권을 주고받으며 벌인 공직 바꿔치기는 오늘날 정당정치의 원형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더욱 극렬한 양상을 보였다.

엽관제가 빚어낸 비극적 사건들은 역사 속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881년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을 암살한 찰스 기토는 파리 영사직을 얻지 못한 데 분개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당선에 기여했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가 배포한 연설문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잭슨 행정부 시절 뉴욕 세관장으로 임명된 새뮤얼 스와트워트는 무려 100만 달러라는 거금을 횡령한 후 해외로 도주하는 추문을 일으켰다.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벌어진 대대적인 인사 개편은 행정의 연속성을 해치고 부패의 온상이 되곤 했다.

이러한 폐해 앞에서 한 현명한 사상가는 이렇게 갈파했다: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엽관제야말로 이 명제의 생생한 증거였다. 능력과 덕망보다는 충성도가, 전문성과 경험보다는 정치적 유대감이 우선시되면서 국정 운영의 효율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침내 미국에서도 1883년 펜들턴법을 통해 실력주의 공무원 제도로의 전환을 꾀하게 되었으니, 이는 엽관제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그런데 엽관제의 그림자는 과연 사라졌을까. 오늘날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목격하게 되는 '낙하산 인사'나 '정치적 임명'은 현대판 엽관제의 모습 그 자체다. 전문성과 연속성을 중시하는 현대 행정학의 관점에서 보면 순수한 엽관제는 시대착오적이지만, 정치적 책임성과 민주적 통제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가 안고 있는 근본적 딜레마가 아닐까.

결국 엽관제란 권력의 속성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정치사의 거울이다. 인간의 욕망과 정치적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이 제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권력과 책임, 충성과 능력 사이의 섬세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영원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권력이 존재하는 한, 이 문제는 결코 완전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勝者爲王 敗者爲寇(승자위왕 패자위구)" -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된다.
*출처: 중국 고전 『사기(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