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그리고 동일성의 아이러니
[테세우스의 배, 그리고 동일성의 아이러니]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었다. 영웅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보존된 그 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낡은 널빤지 하나가 새것으로 교체되고, 또 다른 낡은 부분이 새 목재로 바뀌었다. 세월이 더 흘러 결국 배의 모든 부분이 새것으로 교체되었을 때, 철학자들은 물었다. "이것이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그렇다면 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부품들의 합인가, 아니면 그 형태인가? 혹은 테세우스라는 영웅의 이야기인가?
부품을 모두 교체한 배가 여전히 '그 배'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동일한 것이라 부르는가? 형태인가, 기능인가, 이름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교체된 부품들을 다시 모아 또 하나의 배를 만든다면, 그때 진짜 테세우스의 배는 어느 쪽인가? 형태는 같으나 재료가 다른 쪽인가, 아니면 낡고 흠집 난 원래의 재료들로 이루어진 쪽인가?
우리는 지금 2500년도 더 된 그리스의 역설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이 오래된 수수께끼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과연 어제의 내가 맞는가?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 피부는 2주마다, 간은 5개월마다, 뼈는 10년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7년이 지나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된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7년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나'라는 배는 그대로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배'로 삼고, 시간이라는 바다를 항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을 잃고, 또 새로운 것을 얻는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청년기의 열정도 가라앉는다. 한때 머릿속을 채웠던 지식은 망각되고, 흉터처럼 남았던 상처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자아라고 부르는가? 혹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가 아닌 허상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이를 '무아(無我)'라 불렀다. 고정된 자아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뿐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안다. 자아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의 끈으로 과거와 현재를 엮고, 변화 속에서도 일관된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흐르는 강물이 매 순간 다른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강'이라 불리는 것처럼.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우리의 '디지털 자아'는 어떠한가? SNS에 올린 사진과 글들, 검색 기록과 소비 패턴, 그리고 인공지능이 그려낸 우리의 프로필. 그것은 과연 '진짜 나'인가? 데이터 서버에 저장된 나의 흔적들이 모두 지워진다면, 디지털 세계에서의 내 정체성도 함께 사라지는 것인가?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부품'을 교체해왔다. 언어는 변했고, 영토는 달라졌으며, 정치체제와 문화적 관습도 수없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한국'이라 부른다. 무엇 때문일까? 혹시 우리가 '한국'이라 부르는 것은 특정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꾸는 꿈은 아닐까?
테세우스의 배는 단순한 목재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영웅의 이야기와 아테네인들의 기억, 그리고 그들이 부여한 의미의 총체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배도 단순한 세포의 집합이 아니라, 기억과 관계, 의미로 짜인 이야기의 그물이다.
결국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와 지속 사이의 묘한 긴장, 물질과 의미 사이의 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대화일지 모른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되면서도 여전히 '그 배'로 남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항해를 계속한다.
당신의 배는 지금 어디쯤 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