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정말 써야 할 때만 써야 합니다> 모보(謨父)의 간언

주나라 목왕이 견융을 정벌하려고 하자 제공 모보가 간언했다.

“선조들은 덕정을 베풀었지 무력을 과시한 적이 없습니다. 무기란 평소에는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법. 수시로 휘둘러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선조께서 은나라를 정벌한 것도 무력을 과시하려는 뜻이 아니라 포악무도한 통치자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응징했던 것입니다.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마다 선조들께서는 먼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먼저 자신을 점검하고 덕정을 행합니다.

그런데도 제후들이 정해진 법도에 따라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그 때는 응징을 하거나 심지어 정벌합니다. 이렇게 했기에 멀고 가까운 제후들이 모두 복종했던 것입니다.

지금 견융부족은 선조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고 풍속이 순박하여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와 대적할 정도의 역량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력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목왕은 충고를 묵살하고 견융을 정발하게 되니 이 때부터 이민족들은 더 이상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 사기, 주본기 중 -

(Comment)

힘을 뽐내면 장난이 되고, 장난으로 힘을 사용하면 위엄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칼은 칼 집에 있을 때 더 무섭다는 말.

위정자나 리더, 권력기관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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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못난 정치는 백성들과 다투는 정치다

사마천은 사기, 오제본기에서 리더의 통치행태를 다음과 같이 몇 등급으로 나눴다.


1등급 :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정치, 즉 순리(順理)의 정치

2등급 : 이익으로 백성을 이끄는 정치, 즉 백성을 잘 살게 만드는 정치

3등급 : 백성들이 깨우치도록 가르치는 정치, 즉 훈계형 정치

4등급 : 백성들을 일률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정치, 즉 위압정치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사마천은 여기에 더하여 가장 낮은 등급의 리더 행태를 하나 더 꼽았다. 


바로 ‘가장 못난 정치는 백성들과 다투는 정치’라는 것이다.


군주, 리더, CEO가 백성, 팔로워, 직원들과 다투는 정치. 이는 최악이라는 것이다. 결코 보기 드문 상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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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 안영의 조언>


● 인용

#1

이곳 저곳을 놀러 다니던 제나라 경공이 산동 수광시 남쪽 기대촌이란 곳에서 지금은 망하고 없는 나라 기(紀)의 금 항아리를 하나 얻었다. 뚜껑을 열고 안을 보니 붉은 글씨의 죽간이 있어 꺼내 보았는데 거기에는 “물고기를 먹되 뒤집지 말고, 질 나쁜 말은 타지 않는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2


모두들 이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숙덕였다. 이윽고 경공이 손뼉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 앞의 문장은 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고, 뒤의 문장은 질 나쁜 말은 멀리 가지 못한다는 뜻 아니겠는가?”라며 우쭐해했다.

이를 지켜보던 재상인 안자(晏嬰 안영, 높여서 晏子라고도 한다. 1))는 “신은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3


“앞의 문장은 물고기를 먹되 절반만 먹고 적당한 때 멈추라는 뜻이 아닐가요? 요컨대 군주는 백성에게 세금을 너무 가혹하게 거두지 말고 절반 정도만 거두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게 하라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뒤의 문장은 질이 나쁜 사람과는 접촉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군주로서 인품이 비열한 간신을 기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겠지요.“


#4

하지만 경공은 안자의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그렇다면 이 금 항아리의 잠언은 정말 귀한 보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귀한 글을 가졌던 기국이 어째서 망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안자가 답했다.

#5

“군자는 충고를 들으면 늘 그 충고를 글로 써 놓아 매일 다니는 문 앞에 걸어두고 잊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데 기국은 어땠습니까? 이 귀중한 잠언을 금항아리 깊숙이 담아두고는 막아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러고도 기국이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사기, 관안열전 중 -


● 생각


결국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이를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통한 촌철살인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안자.


훌륭한 참모의 전형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 참고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 나라의 정치가로 이름[諱]는 영(嬰), 자(字)는 중(仲)이다. 안자(晏子)라고 존칭(尊稱)되기도 한다. 제(齊) 나라 영공(靈公)과 장공(莊公), 경공(景公) 3대에 걸쳐 몸소 검소하게 생활하며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관중(管仲)과 더불어 훌륭한 재상(宰相)으로 후대(後代)에까지 존경을 받았다.


재상(宰相)이 된 뒤에도 한 벌의 옷을 30년이나 계속해서 입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안영호구(晏嬰狐裘)’라는 말이 비롯되었는데, 이는 고관(高官)이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벼슬에 있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간(忠諫)과 직언(直言)을 하는데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의롭게 행동하여 이름을 떨쳤다.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崔杼)에게 살해당했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곡(哭)을 하며 문상(問喪)을 하는 용기를 보였다.

때문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안영에 대해 “만일 안자가 아직 살아있어 내가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고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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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말하는 친구의 종류>


사마천 사기(史記) ‘계명우기(鷄鳴偶記)’편에서는 친구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외우(畏友) : 덕과 의로써 서로를 연마하고, 과실이 있으면 이를 충고할 수 있는 경외로운 친구

둘째는 밀우(密友) : 급한 일을 함께 하고, 생사가 달린 것을 서로 의탁할 수 있는 친구

셋째는 일우(昵友) : 고되고 힘든 일을 기꺼이 하고, 함께 즐기는 친구

넷째는 적우(賊友) : 이익을 서로 빼앗고, 재난을 바라는 도둑같은 친구



이어 사마천은 ‘도덕상 서로를 격려하고, 과오와 실수가 있으면 서로 충고하고 돕는 경외로운 벗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고생을 함께 하며 생명을 위탁할 수 있는 비밀스런 친구가 나의 인생에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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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마천이 치욕적인 ‘궁형’이라는 형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간략히 그 내막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문제는 흉노 때문

 

(1)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던 한 무제.  그 전까지 열세였던 흉노와의 대외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對) 흉노 정책을 ‘공세(攻勢)’로 전환함.  이에 따라 대대적인 흉노정벌 단행됨. 이 과정에서 무인 집안 출신의 이릉(李陵) 장군도 정벌에 나섬.


(2)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 탓에 이릉 장군의 5,000결사대가 그만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됨. 당시 흉노의 군사는 3만 명이었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때 나옴,.


(3) 이릉 장군 군대는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5,000결사대 가운데 400명만 살아남음.결국 흉노에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도 항복하게 됨.

 

2. 이릉 장군을 비판하는 분위기 및 바른말 하는 사마천

 

(1) 한나라 조정은 매국노 이릉을 성토하는 장으로 변함.


(2) 하지만 우리의 사마천 형님은 ‘이릉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항복한 것이며 그는 훌륭한 장수다’라고 변호함 (남들이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하셨던 사마 형님)

 


(3) 그런데 이 발언이 한무제를 분노케 함(이 시키가 지금 상황 파악을 지대로 한 거야 못한 거야?)


(4) 사마천은 여느 관리처럼 잔머리를 쓰는 그런 양반이 아니었음. 사마천은 이릉이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릉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나라 군의 작전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지적함. 나아가 책임의 일부는 군 최고 사령관에게 있음을 지적.(아… 까칠한 사마천 형님)


(5) 문제는 군 최고 사령관이 한무제의 처남인 이광리(李廣利)라는 점.  한무제의 애첩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 이광리 장군에 대한 비판은 곧 한무제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짐.


(6) 결국 괘씸죄에 걸린 사마천은 한무제에 의해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히고 마는데, 이 때 사마천의 나이 48세. (이 당시에 48세면, 요새로 치면 거의 환갑일세. 환갑에 인생이 완전 꼬여버린 사마천 형님)

 

3. 결국 형벌을 받게 됨.

 

(1) 이후 상황도 사마천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음.(이런 젠장.. 첩첩산중, 설상가상)


(2) 화가 난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사마천에게는 사형을 명했음.,


(3)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임.  ’첫번째 방법은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방안. 일명 속전(贖錢)’, ‘두번째 방법은 궁형,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 

궁형은 중국의 10대 혹독한 형벌 중의 하나. 궁형 외에 다른 9개의 혹독한 형벌은 육체적인 형벌에 그쳤지만, 궁형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되는 치욕의 형벌이었음.


(4)  사마천은 속전을 감당할 돈이 없었다. 사나이로서 깨끗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자처했다. 왜 그랬을까? 다름아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 때문이었다.

 

4. 치욕을 견딘 까닭

 

(1) 궁형을 자청하던 때 사마천의 나이 49세(AD 91).

 

(2)  사마천이 51세 때 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치욕감을 느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아홉 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멍하니 무엇인가를 잊은 듯 어처구니가 없고 자꾸만 부끄러워져 언제나 등골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의지를 친구 임안에게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남김.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3)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사마천은 같은 죽음일지라도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택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 사마천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5.  엄청난 작업

 

(1) 요즘이야 컴퓨터 자판으로 책을 쓰면 되지만, 당시 사마천은 52만 6,500자의 <사기>를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이나 나무를 얇게 오린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써야만 했음. 그것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冊)이 되고, 이 책을 둘둘말면 권(券)이 되는 것임.


(2) 사마천은 42세이후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됨.


(3) 궁형을 계기로 <사기>의 세계관이 크게 바뀜. 궁형 전까지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찬양하는 교향곡이었음.  하지만 궁형 이후 <사기>에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비판하는 시각이 들어가게 됨.


(4) 특히 사회의 곪아 터진 부분과 권력층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세태를 풍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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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끈하던 우정이 배신으로 변해간 과정> 장이-진여 열전

#1

위나라 수도인 대량 출신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모두 전국시대라는 약육강식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임.

나이가 더 많은 장이는 위나라 현령으로 있으면서 진여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고, 진여도 그런 장이를 친형 이상으로 존경하며 따름,

두 사람의 우정은 점차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입에 좋게 오르내림.

#2

BC 225년, 위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망함. 그 후 진나라는 초, 연, 제 등을 멸망시키고는 마침내 BC 221년 천하통일에 성공함.

#3

진(秦)나라는 장이와 진여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 그러자 두 사람은 함께 진(陳)으로 도망쳐 성문을 지키는 일을 함. 두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위기를 피하고 난관을 헤쳐 나감.

이렇게 10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사이 진시황이 갑자기 죽자,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짐.

#4

BC 209년 농민 출신 진승이 진의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킴. 그러나 장이와 진여는 진승 밑에 들어가 교위(장군의 보좌관) 벼슬을 받고 조 나라 땅으로 진격함.

#5

얼마 뒤 장이가 진나라 군대의 협격을 받아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는데, 이 상황에서 믿었던 진여가 위급한 상황을 알고서도 제 때에 구원병을 보내지 않음.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생김. 결국 항우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관중지방을 압박함으로써 비로소 장이는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

#6

진승은 이미 망했고, 항우는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난 군소세력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는데, 이 때 장이는 상산왕에 임명된 데 비해 진여는 세 개의 현을 관할하는 작은 자리에 머뭄. 이 때부터 두 사람 사이는 그 감정의 골이 깊어짐.

#7

분함과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진여는 제나라 왕 전영에게 장이를 공격하도록 부추기고, 이를 미처 방비하지 못한 장이는 도망치게 됨. 결과적으로 조나라에서 진여는 파워를 갖게 되었으며, 진여에게 패해 각지를 전전하던 장이는 유방에게 몸을 맡김.

#8

BC 205년 항우에게 선전포고를 한 유방은 초나라로 진격하기에 앞서 사신을 보내 조나라의 협조를 구하려 함. 그러자 진여는 교환조건으로 장이의 목숨을 요구함.

하지만 장이를 죽일 수 없다고 여긴 유방은 장이와 닮은 사람을 찾아 그 목을 베어 진여에게 보냈고, 진여는 약속대로 군사를 파견하여 유방을 도움.

그러나 머지 않아 그 머리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진여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그 결과 유방과 조나라는 등을 지게 됨.

#9

이듬해인 BC 204년, 유방은 한신과 장이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게 함. 이 전투에서 조나라는 패하고, 진여는 전사했으며, 유방은 장이를 조나라 왕에 임명함.

#10

사마천은 장이, 진여열전 끝 부분에 이렇게 논평을 남긴다.

“장이와 진여는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자하던 자들이다. 장이와 진여는 당초 가난하고 보잘 것 없었을 때 목숨을 걸고 서로 믿기로 맹세하였으니,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몸을 맡겨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없애려 했다. 처음에는 서로 사모하고 믿는 마음이 그리도 진실되더니 뒤에는 어찌 그리고 심하게 서로 배반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 사마천 사기 장이.진여 열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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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친구를 만났다.

억울하게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고, 상심이 큰 상태였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그럼에도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계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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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일급 장수였던 계포(季布).

계포는 초한전에서 끊임없이 유방을 괴롭혔다.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계포의 목에 천금의 상금을 걸었다.

계포는 주씨(周氏) 집에 몸을 숨겼다.

주씨는 계포에게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했다. 계포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자르고 허름한 옷을 입혀 노예로 변장시킨 다음 다른 노예들과 함께 노나라의 협객인 주가(朱家)에 그를 팔았다.

주가는 대단한 협객이었고, 계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결국 주가의 노력으로 계포는 유방에게 발탁되어 벼슬이 중랑장에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주가의 유방 측근에 대한 설득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우 아래서는 어느 누구도 빛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계포는 일찍부터 명성이 대단했다.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빼앗은 적기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계포도 일단 쫓기는 몸이 되자 노예로 변장하면서까지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한 결단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계포는 자기의 능력을 믿고 굴복을 능히 감수했던 것이다. 또한 자기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굴욕을 참고 견딘 끝에 한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진실로 용기있는 자는 가벼운 죽음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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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상군의 주도면밀함>

전국시대 사공자(제의 맹상군, 조의 평원군, 위의 신릉군, 초의 춘신군) 중 한 명이었던 맹상군은 자신의 집에 능력있는 식객(문객)들을 기거하게 하면서 자신의 일을 돕게 한 일로 유명하다.

맹상군은 식객들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몸소 그들을 맞이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병풍 뒤에서 비서가 그 대화내용을 일일이 기록했다고 한다.

특히 식객의 가족사항은 빼놓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식객이 작별인사를 고하기 전에 일찌감치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선물 따위를 전달했다고 한다.

(Comment)

맹상군은 아주 전략적으로 detail했군요. 더욱이 비서를 통해 대화내용 중에서 상대방의 가족에 관한 정보는 기록해 두었다고 하니. 누구나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부분은 약해지는 법.

우리가 명함을 받으면 나중에 그 명함에 간단히 그에 관한 정보를 메모해 두는 것에 비교하면 몇 수 더 높은 경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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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장벽>

중국 전설의 왕조인 하(夏).

하나라 건국의 배경은 황하의 치수(治水)에서 비롯됨.
황하는 길이가 5,000여 킬로미터나 되는 강줄기로 유역 면적이 우리나라 전체의 3.5배에 달함.
이곳은 고대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지만 범람이 잦아 재해가 뒤따름.

처음에 치수사업을 맡은 사람은 ‘곤’.
곤은 두 가지 방침을 세우고 일을 시작.
‘인(陻), 메우다’와 ‘장(障), 가로막다’.

따라서 물이 범람할 것 같으면 제방을 쌓아서 막고, 침수 위험이 있는 곳에는 흙을 퍼다 메웠음. 그러나 강물은 여지없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다른 저지대로 흘러감. 제방을 쌓고 흙을 퍼다 메우기를 9년.
곤의 치수는 실패로 끝나고 우산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함.

그리고 곤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담당하게 됨.
우는 부친의 실패를 면밀히 검토 후 방침을 달리 세움.

그 방침은 ‘소(疎), 통과시키다’와 ‘도(導), 이끌다’.

즉 제방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물길을 만들어서 통과시키고 여러 갈래로 분산시켜 범람과 침수를 막은 것. 즉 우는 물의 성질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것임.

우의 노력은 결국 열매를 맺었다.
-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 
 
(Comment)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소(疎), 통과시키다’와 ‘도(導), 이끌다’.

이 두 글자를 가슴에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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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의 깨달음과 그를 대부로 발탁한 안자>

#1

안자가 외출을 하려고 하는데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을 엿보고 있었다. 재상 안자의 마부인 남편은 마차의 큰 차양 아래에 앉아 네 마리 말에 채찍질을 하며 의기양양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2

마부가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마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이 까닭을 물으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3

“키가 여섯자도 못되는 안자는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 명성을 날리고 있지요. 오늘 재상이 외출하는 모습을 보니 품은 뜻은 깊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태이더군요. 그런데 키가 여덟 자나 되는 당신은 남의 마부 주제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더군요. 제가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4

그 후 마부 남편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졌다. 안자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마부가 사실대로 대답했고, 이에 안자는 마부를 대부로 천거했다.

- 사마천 사기, 관안열전 -

(Comment)

이 이야기는 마부인 남편을 대부로 출세시킨 아내의 성공 스토리 같아 보이지만, 실은 전과 달리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 마부를 대부로 발탁한 안자의 안목과 인간관계에 대한 안자의 남다른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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