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소송에서 배우는 인생이야기 : 민사소송법보다 강력한 아버지법


선배의 소개로 소송 상담을 위해 손님이 찾아왔다. 공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는 정도의 개략적인 설명만 선배로부터 들은 정도였다. 


회의실에서 의뢰인의 설명을 쭉 들어보니, 계약서 조항 해석과 관련해서 다툼이 있는 사건이었는데 소송을 통해 충분히 싸워 볼 만한 내용이었다. 나는 의뢰인으로부터 문제가 된 계약서를 넘겨 받아 계약서 조항을 세밀하게 검토한 후 제일 마지막 부분의 서명란을 보았다.


앗! 나의 실수. 


처음부터 누구를 상대로 하는 소송인지 파악했어야 하는데...

나는 계약서를 의뢰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이 소송은 맡을 수 없습니다.”


의뢰인은 깜짝 놀라면서 “왜 그러시나요? 혹시 우리가 상대하려는 회사와 변호사님 사이에 어떤 계약이 되어 있으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의뢰인의 질문처럼 변호사들은 이미 고문계약이 되어 있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건 아니구요. 어쨌든 이 사건은 제가 맡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변호사님과 상의해 보시길 바랍니다.”라면서 양해를 구하고 그 분을 돌려보냈다. 


한 시간 뒤 선배가 전화 왔다. “어이, 조변호사! 어떻게 된 거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건을 안 맡았다면서? 왜? 질 것 같은 소송이었나?” 


휴... 선배. 소송의 승패를 떠나 제가 그 사건을 맡지 못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 개인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답니다.



외할아버지는 철도공무원으로 평생을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임하셨다. 아버님도 철도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어머니도 한 때 철도공무원이셨다. 그래서 나는 모태 철도가족이다. 


아버님은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내시고 29세에 철도공무원이 되셨다. 최초 발령지가 아버님의 고향인 경남 밀양역. 그 당시 밀양역의 조역(역에서 역장 다음으로 높은 직위)으로 계시던 분이 외할아버지. 그리고 밀양역에서 “여기는 밀양역입니다.”라고 방송을 하고 계시던 분이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밀양역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셔서 연인사이가 되었고, 결국 결혼하셨다. 





아버님은 꽤 오랫동안 몸이 안 좋아서 고생을 하셨다.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님은 젊은 시절 몸을 혹사하셔서 온 몸의 장기(臟器)가 다 제구실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님 키가 176cm인데 당시 몸무게가 50kg 정도였으니.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집안 풍경은, 아버님은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출근을 못하시고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항상 약을 달이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우리 가족들에게도 숨통을 틔울 신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주말 기차여행이었다. 아버지 운동차원에서 기획된 것인데, 말이 거창해서 기차여행이었지 실상은 온 가족이 기차를 타고 밀양역에서 부산역까지 간 뒤 부산역 앞 제과점에서 빵이나 팥빙수를 먹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당시 철도청 직원들에게는 PASS가 발급되었는데, 그 PASS만 제시하면 가족들도 모두 무료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물론 좌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 자리가 있으면 앉아서 갈 수도 있었고, 굳이 자리가 없다고 해도 밀양에서 부산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했으니 차창 밖을 보면서 가노라면 그 시간이 별로 길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6학년 초여름 어느 일요일. 그 날도 우리 가족은 밀양역을 출발해서 부산역까지 갔다가 다시 밀양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밀양역에서 내렸고, 기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하려는데,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어떤 할머니가 아직 기차 난간에 발을 올리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어!’라고 소리쳤지만 선뜻 어떻게 하지 못하고 쳐다 보고만 있었다. 


그 때였다.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그 할머니쪽으로 달려가셨다. 그러자 어머니가 옆에서 큰 소리를 쳤다. 


“가지 마이소!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 보소! 가지 마이소!”


어머니는 아버지를 얼른 잡으라고 나를 밀었다. 그런데 워낙 쏜살같이 달려가는 아버지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정말 신기한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내가 주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방에 누워계시거나 힘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달려간 아버지는 할머니를 뒤에서 손으로 받친 다음 난간으로 힘껏 들어 올리셨다. 할머니는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고, 아버지는 발을 헛디뎌 플랫폼에 넘어지셨다. 


“내가 못 산다카이. 큰 일 날뻔 했잖소? 다치믄 우짤라꼬 힘도 없는 사람이…….”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셨다. 

아버지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시고는 “괜찮다. 손님이 사고나믄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재발견! 항상 무기력해만 보이던 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나는 그 날부터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한 뒤, 나는 철도청에서 주는 장학금을 4년 동안 받고 다녔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성아. 철도가 얼마나 고마운 지 니는 알아야 한데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제대로 출근 못해도 정년까지 돈 벌게 해 준 곳이다. 니 장학금도 대주고. 진짜 우리 집안의 은인이다.”


대학교 3학 년 때, 아버지와 벌초하러 고향 선산에 갔을 때다. 한창 벌초를 하고 있었는데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벌초를 멈추시고 한참동안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참 이상하재. 기차만 보이면 이래 마음이 편하네.”


나는 속으로 ‘우리 아버지, 진짜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변호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 어느 날 아버지가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앞에 놓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의할 점을 일러 주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부탁이 한 가지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성이 니가 앞으로 변호사를 하다보믄 별의 별 사건을 다 맡을 건데, 절대 철도를 상대로 싸우믄 안 된다. 이거 하나만 약속해라. 철도는 니 은인이다. 알겠나?”


아버지의 말씀이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 잘 알기에 나는 “걱정마십시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드렸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철도공사를 상대로 한 소송 상담을 하게 된 것이 두 번 정도였다. 물론 두 번 다 내가 직접 수행하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그 소송을 맡지 않아도 이를 대신 수행할 변호사는 주위에 많을 것이기에. 

지금도 아버지는 지방에 가실 때 KTX를 타시면 꼭 특실을 고집하신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놀랍다. 


“내가 노인석 비용을 내고 탈 수도 있지만, 내가 몸담은 회사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비싼 티켓 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니 공부 잘 시켜줬으니 니가 그 정도 돈은 내야 맞제?”


‘네, 얼마든지요. ’


내가 철도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이유, 민사소송법상 회피나 기피사유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민사소송법보다 더 무서운 바로 ‘아버지법’ 때문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 대한 애정의 깊이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네 아버지 세대는 당신들이 몸 담았던 직장에 대해 선뜻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지극한 애정을 갖고 계신다. 그 이유는 직장이 당신들에게 월급을 줬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신들의 소중한 인생과 추억이 고스란히 그 곳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 이상 현역일 수 없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현역처럼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 대해 애정을 갖고 계신 우리 아버지들. 


그 분들의 피가 우리의 그것보다 뜨겁지 않으리라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분들도 다 털어놓지 못한 가슴 속 뜨거운 이야기가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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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시영 2017.08.10 12:45 신고

    역시 아버지도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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