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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변호사의 고전,역사에서 배우는 협상이야기(2) 중종과 조광조

협상/interest

by 조우성변호사 2012. 12. 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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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변호사의 고전,역사에서 배우는 협상이야기


제2화 :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유교적 이상정치 같소?(중종과 조광조)


▢ 사례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이른바 유신 정치를 추진하였다. 


앞서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연산군 대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 성균관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이는 유학을 진작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앞서 사화를 겪으며 귀양을 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을 소환하여 중용하였다. 중종이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대 시행되던 과거제가 주로 기예만 시험을 본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덕성에 바탕한 관인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을 일단 하옥되었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 분석


조선왕조를 통털어 조광조처럼 단기간 내에 승진을 거듭하다가 급전직하로 떨어져 사약을 받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이 사례를 협상론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광조는 ‘중종’의 욕구(interest)나 숨은 욕구(hidden interest)를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중종이 누구인가?


연산군의 폭정에 못이겨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력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어버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그러나 말이 왕이었지 중종은 아무런 실권을 행세할 수 없던 처지. 


오죽했으면 중종이 왕에 오르자 제일 처음 한 일이 자신의 부인(단경왕후 신씨)을 궁궐 밖으로 내치는 것이었을까. 왜냐하면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 대에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기에 중종 반정세력들은 신수근의 딸을 그대로 왕비의 자리에 둘 수 없었다.





<단경왕후 능 사진>


모든 정치는 반정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

중종은 반정세력들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눈에 띄인 것이 울트라 모범생 조광조.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신임과 지원은 전폭적이었다.

조광조는 생각한다.


‘아하. 왕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내 생각과 일치하고 있구나. 좋다. 그럼 유교정치를 제대로 발휘해 보자. 국초에 정도전 대감이 태조 임금과 짝을 맞추었듯이 나는 왕(중종)과 함께 제대로 된 유교정치를 펴리라.“


이 때부터 조광조는 급진적인 정책을 편다.


문제는 어느 순간 중종이 개혁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대해서 ‘좀 검토해 봅시다’라고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 조광조가 내세우는 카드는 ‘사퇴 후 낙향’


조광조는 분명 성균관 유생들이 자기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중종도 내심 그런 방식을 통해 자기에게 힘을 실어 주리라 믿었던 듯 하다.


계속되는 사퇴, 유생들의 청원(광조를 돌아오게 하셔야 합니다), 중종의 간청(광조 대감, 돌아오시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중종은 피로감을 느꼈고, 이를 간파한 것이 바로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 3인방은 중종에게 가서 ‘힘드시죠? 저희들이 한번 움직여 볼까요?’라고 넌지시 의중을 비추었고, 중종은 연판장에 날인을 해 줌으로서 자신의 의중(조광조를 제거하라)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조광조는 하옥된 뒤 줄기차게 ‘상감마마를 한 번만이라도 뵙게 해 주십시오. 이건 뭔가 착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광조는 사약을 받을 때까지 중종을 알현하지 못한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바랬던 것은 무엇일까?


조광조가 반정세력에 대한 대항마 정도로 자리 잡으면서 반정세력을 견제해주면, 왕이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상황. 이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중종의 숨은 욕구(hidden interest)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지지가 ‘유교정치의 완성’이라고 믿고 너무 내달렸던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의 그 숨은 욕구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 Tip


현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Top의 의중을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고 내달릴 때 나중에 Top과 충돌할 우려가 있다. 자신이 추진하는 일에 Top과의 교감이 꼭 필요하자면, 자신의 관점이 아닌 Top의 관점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예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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